

마틴 루터 킹(Rev. Martin Luther King, 1925~1968) 목사는 미국의 민권 운동가요 위대한 설교자요 연설가이다. 그는 1963년 8월 28일 워싱턴의 링컨 메모리얼 앞에서 불멸의 “나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I have a Dream)”이라는 메시지를 전했었다. 그의 인종차별 철폐에 대한 위대한 메시지는 한 사람에게 꿈을 심어 주었고, 결국 오바마 대통령을 탄생시켰다.. 
아직도 진화론을 믿으세요?
모든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핵심인 <창조론>을 깨부수고 <진화론>이 가장 설득력 있는 자연과학이라고 믿고 있다. 인간이 과학을 우상화하면서 <진화론>도 과학의 결정체라고 해서 철석같이 믿고 있다. 그러나 진화론은 그냥 가설(假說)이고 논(論)이고, ‘그럴 것이다’라는 의견이고 추측일 뿐이다. 그런데 이것을 과학으로 믿는 사람이 참으로 많다. 대학 교수들은 물론 모든 지성인, 유치원에.. 
세 마리 작은 여우들
1901년 아브라함 카이퍼 박사(A. Kuyper, 1837~1920)는 네덜란드의 수상에 올랐다. 그가 당수로 있었던 A.R.P. 정당은 소수당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연정을 통해서 드디어 정상에 올랐다. 그의 꿈은 국가와 교회를 칼빈주의적 세계관 위에 세우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 시대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사상이 누룩처럼 퍼지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교회도 합리주.. 
동해(東海)는 한국해이다
한국계 교토국제고등학교가 일본 고교야구의 꿈의 무대 고시엔에서 정상에 올랐다. 160명밖에 되지 않는 미니고등학교이다. 그들은 운동장 길이가 기껏 70m도 되지 않는 열악한 가운데서도 영화 같은 기적적인 우승을 했다. 그런데 일본 전역에서 모여든 재일동포 2,800여 명이 야구장 응원석에 앉아 극적인 우승장면을 보고 울고 또 울었다. 나도 그 광경을 보고 울었다. 그들이 우승과 함께 한국어로.. 
예배가 변질되면 교회는 쇠퇴한다
얼마 전 퇴직 5일을 남겨둔 한 판사님께서 “코로나 시국에 예배를 드리는 것은 잘못이다!”라고 당시 정부의 강경한 조치를 옳다고 판결했다. 역사적으로 한국교회는 4번 예배를 통제받았다. 첫 번째는 1938년 신사참배 강요로 예배가 무너졌고, 두 번째는 1942년 2월부터 8월 15일까지 일제는 한국의 예루살렘이라고 할 수 있는 평양 일대의 교회를 폐쇄했다. 세 번째는 8·15 해방 후 북쪽의.. 
세상을 뒤집어 놓은 한글
1973년 나는 네덜란드의 암스텔벤(Amstelveen)이라는 도시의 아파트 거실에서 <한글 학교>를 만들었다.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주재 상사의 자녀들 8명 정도였다. 그 아이들은 외국에서 생활하다 보니 한국말을 잘 모르고 한글을 읽고 쓰는데 어려워했다. 그래서 시작된 한글 학교는 지금은 큰 한국어 학교로 성장하였고, 한류 열풍이 불어 그곳 현지인들도 줄을 서서 한글을 배운다고 한다. 그러.. 
80년 묵은 죄인
1618년 그해 가을에 네널란드의 한 작은 어촌 돌트레흐트(Dordtreht)라는 곳에서 ‘국제 기독교회의’가 열렸다. 우리는 그것을 흔히 ‘돌트 총회’라고 부른다. 개혁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국제회의 장소인 만큼 나는 두어 번 그곳에 가 본 일이 있고, 그 교회 담임목사와 담화를 나누기도 했다. 돌트 개혁교회에는 신학자와 평신도 대표 100여 명이 모였다. 화란 개혁교회 지도자들은 말할 것도.. 
레만 호숫가의 추억
필자가 스위스 제네바를 방문한 것은 52년 전이다. 나는 암스텔담에서 제네바까지 갈만한 여비가 없어서 ‘취리히에서 열리는 선교대회에 참여한다’는 조건으로 따라갔었다. 취리히에서는 큰 전도대회가 열렸고 숙소에 여러 명이 함께 머물면서 각국에서 참가한 사람들과 교제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칼빈에 대한 관심 때문에 슬그머니 숙소를 빠져나와 제네바로 갔다. 제네바의 레만 호숫가의 한 호텔에 머물.. 
“나라도 없는 놈이 천당을 가?”
남강 이승훈 선생은 3·1만세 운동의 선두에서 지휘하였고, 오산학교를 세워서 위대한 애국지사를 길러냈다. 어떤 글을 보니 ‘남강 선생은 한국의 페스탈로치(스위스 교육학자, 사상가)다’라고 칭송했다. 그는 구식 서당 출신으로 장돌뱅이로 시작해서 거상이 된 전형적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그는 <3·1 독립운동선언서>를 만들도록 기획했고, 기독교 대표들을 비롯하여 천도교와 불교 대표들까지 아우르면서.. 
카이퍼와 이승만(10)
지금까지 카이퍼 박사와 이승만 박사를 비교 관찰했다. 앞서 말한 대로 카이퍼와 이승만은 지구 반대편에 살았지만, 그들의 인물됨과 정치가, 설교가, 연설가로서 또는 저널리스트로의 삶을 살펴보았다. 이승만은 카이퍼와 직접 만난 일은 없어도 간접적으로 카이퍼의 칼빈주의적 세계관을 접했고 그의 신학을 이해했다고 썼다. 이승만이 프린스턴신학교에 몸담고 있을 때는 ‘모든 교수와 학생들이 카이퍼의 사상에.. 
카이퍼와 이승만(9)
카이퍼와 이승만은 그 시대에 걸출한 대인(大人)이었다. 그들은 모두 철저한 하나님 중심의 사람이요, 기도자요, 문필가요, 대설교가이자 연설가였다고 앞에서 여러 번 말한 바가 있다. 교회를 개혁하고 정치를 개혁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발붙이고 사는 ‘사회를 개혁’하는 것이었다. 사회를 개혁하는 것은 이른바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자들이 말하는 이상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 개혁이란 ‘정치지도자들이.. 
카이퍼와 이승만(8)
카이퍼와 이승만은 그 시대의 국제맨이었다. 지도자가 되려면 글로벌 마인드가 필요할 뿐 아니라, 거기에 따른 외교력은 물론이거니와 출중한 어학 실력이 뒷받침 되고 준비된 사람이어야 한다. 거기다가 미래를 내다보는 선견자 적인 지도자여야 한다. 카이퍼는 네덜란드 정치지도자로서 그렇게 준비된 지도자였고, 이승만 또한 몰락한 이조와 나라를 빼앗긴 후 망명하여 40년간 고생을 하면서 지도자로서 준비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