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0년 청산리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둔 독립군. 맨 앞 앉아 있는 사람이 김좌진 장군
    [안보칼럼 66] 한일합병(경술국치)
    1910년 8월 22일 오후 2시, 창덕궁 흥복전에서 조선의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렸다. 총리대신 이완용은 일본과 합병을 해야 한다고 한 시간 넘게 설명했고 대신 누구 하나 반대도 항의도 없었다. 이완용은 한일합병을 가결시키고, 데라우치 통감의 관사로 찾아가서 합병조약을 체결했다. 이완용은 합병의 공으로 훈1등 백작, 수당 60원, 퇴직금 1,458원, 총독부 공채 15만 원을 받았다. 191..
  • 서양식 양복을 입은 고종 황제
    [안보칼럼 65] 고종의 퇴위
    일제는 을사보호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뒤에 1906년 통감부를 설치하였다. 고종 황제는 대한제국의 독립을 주장하기 위해서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비밀리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방해로 회의장에 들어가지도 못하자 울분을 억누르지 못한 이준은 자결하였고, 세 명의 특사가 헤이그에 도착할 수 있도록 도와준 헐버트 선교사는 추방당하고 말았다. 이토 히로부..
  • 국채보상운동 기록물. 1907년 2월 일제의 차관을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으로 나라 찾기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됐다.
    [안보칼럼 64] 러일전쟁과 한일의정서
    1904년 2월 8일 일본의 육군 선발대가 인천 월미도에 상륙하여 서울로 향하는 한편 일본의 함대는 여순의 러시아 함대를 기습 공격하여 9일에는 인천 앞바다에 러시아 함대와 격돌했다. 그리고 10일에는 러시아와 일본은 각각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을 시작했다. 주한 러시아 공사는 12일에 러시아 군대의 보호를 받으며 서울을 빠져나갔다. 대한제국은 이미 1904년 1월 23일에 중립을 선언했다. ..
  • 일제 강점기 당시 경복궁과 그 앞에 세워진 조선총독부
    [안보칼럼 63] 일제의 전략적인 조선침투, 을미사변
    청일전쟁 이후 조선 내정을 장악한 일본에 반일운동을 이끈 사람은 명성황후였다. 명성황후가 러시아 공사 웨베르 등 각국 공사의 도움을 요청하며 일본의 침략을 저지하고 나서자 일본 외무성은 육군 중장 출신의 미우라 고로를 공사로 발령해서 명성황후 제거 작전을 시작했다. 1895년 9월 1일 조선에 부임한 미우라는 9월 17일 한성신보 사장 아다치 겐조와 ‘여우사냥’이라는 작전명으로 10월 8일 ..
  • 창덕궁 대조전의 동쪽 부속건물인 흥복헌(興福軒)은 1910년 경술국치를 결정하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린 장소다.
    [안보칼럼 62] 한일 강제 병합(경술국치)②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에서 금천교를 지나, 진선문과 인정문을 거쳐 선평문으로 들어서면 왕비 처소인 대조전이 나타난다. 흥복헌은 대조전에 이어진 정면 3칸의 작은 부속건물이다. 1907년 7월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강제 폐위 유폐된 고종에 이어 황제로 즉위한 순종은 이제 11월 경운궁(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긴 뒤 왕비 처소에서 지냈다. 1926년 4월 순종이 숨을 거둔 곳도 흥복헌이..
  • 1910년 8월 22일,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이척 이종(李坧)이 이완용에게 부여한 일반 위임장
    [안보칼럼 61] 한일 강제 병합(경술국치)①
    1910년 8월 22일 뉴욕타임스는 ‘나라로서의 한국은 이번 주 사라진다. 어떤 소유도 예상되지 않는다. 철저한 일본 경찰의 통제 때문에 한국인들은 현재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도 전혀 모른다’고 보도했다. 미국과 영국 등 서구의 언론들은 한일 강제병합 조약 체결 전부터 일제의 한국 병합 사실을 쏟아내고 있었다. 1910년 8월 18일 자 뉴욕타임스는 ‘일본이 한국을 병합한다’라는 제목의 기..
  • 1907년 제2차 만국평화회의 전경
    [안보칼럼 59] 한일 경술국치 5가지 조약, 헤이그 만국평화회의(1)
    1909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의 가장 큰 성과와 기대는 국제중재재판소이다. 만국평화회의를 기획한 러시아 국제법 학자 마르텐스는 문명사회는 갈등과 폭력이 아니라 중재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이것을 문명국가로 이루어진 국제사회에 적용하고자 했다. 국제적인 갈등을 전쟁이 아니라 상설 중재재판소를 통해서 해결하는 시스템은 재판소 설립 초기부터 동아시아를 비롯한 국제사회의 엄청난 변화를 ..
  • 일본과 러시아 대표들이 포츠머스 회담을 하는 모습
    [안보칼럼 57] 한일 경술국치 5가지 조약, 포츠머스 조약(1)
    1904년 일본과 러시아의 전쟁이 벌어졌다. 고종은 전시 중립을 선언하고 중립화 외교를 펼쳤다. 그러나 스스로 지킬 힘이 없는 중립화 외교선언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조선을 둘러싸고 일본과 러시아 등 열강들의 각축이 본격화되면서 1900년대 초반 고종의 주된 외교정책은 중립화였다. 특히 1900년 중국의 의화단 사건으로 열강의 한국 출병 가능성이 고조되었다. 고종이 그해 주일공사로 임명한 조병..
  • 1905년 9월 5일 미국 포츠머스에서 열린 강화회담에서 러시아 전권대표인 비테 전 재무대신(왼쪽)과 일본 전권대표인 고무라 외무대신(오른쪽)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가운데) 앞에서 인사를 나누고 있다.
    [안보칼럼 58] 한일 경술국치 5가지 조약, 포츠머스 조약(2)
    포츠머스시는 미국의 독립전쟁 유적지를 소개하는 보스턴의 프리덤 트레일을 모방해서 포츠머스 트레일까지 만들었다. 포츠머스의 교회와 학교는 매년 9월 5일 오후 3시 47분이면 해군조선소의 경적 소리에 맞춰서 10분간 종을 울려서 포츠머스 조약을 기념한다. 포츠머스 회담 이래 이어져 내려오는 소도시의 전통이다. 뉴햄프셔주는 이미 9월 5일을 포츠머스 조약의 날로 선포하고 주정부 차원의 기념행사를..
  • 제2차 영일동맹 체결을 기념하여 1905년 도쿄 미쓰코시 백화점에서 발행한 엽서
    [안보칼럼 56] 한일 경술국치 5가지 조약, 영일동맹(2)
    이중플레이를 한 적이 없다는 이토의 말은 거짓이었다. 러시아에서 니콜라이 2세와 람스도르프 외무장관을 먼저 만나서 협상을 벌였다. 이토의 행적을 알고 있었던 랜스다운 영국의 외무장관도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러시아 파였던 이토는, 이때는 영국과 동맹을 맺는 쪽으로 돌아서 있었다. 가쓰다 다료 총리, 고무라 주타로 외상, 하야시 나다스 주영 일본대사가 추진한 영일동맹에 메이지 일본 왕..
  • 일본 외무성이 소장한 1902년 1월 30일에 체결된 영일동맹 문서
    [안보칼럼 55] 한일 경술국치 5가지 조약, 영일동맹(1)
    영국과 일본이 맺은 1902년의 동맹은 일본의 경제, 군사적 영향력을 확대하고, 결국 대한제국을 일본의 속국화로 이끄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일본은 한반도에서 경제적 영향력이 증대되었지만, 국제적으로 정식 지위가 인정되지 않았다. 제2차 영일동맹의 전문은 한국의 독립, 영토보전 보장이 삭제되고, 일본이 한국에서 정치·군사·경제적인 이익을 보호하고 증진할 권리를 인정하게 되었다. 일제는 러일..
  • 1895년 철거하기 전 영은문. 조선이 중국 사신을 맞이하기 위한 상징적 관문이었으나 시모노세키 조약 이후 철거됐다. 그 자리에 1897년 독립문이 세워졌다.
    [안보칼럼 54] 일본의 한국침략을 위한 5가지 조약(2)
    불과 한 세대 만에 서양식 근대화에 성공하고 제국주의로 성장한 일본의 힘은, 메이지유신을 통해서 국정개혁과 서양식 문물제도를 적극적으로 수용했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를 할 수 있는 정신적 뿌리가 선견자를 길러낸다는 요시다 쇼인이다. 야마구치현 하기시에 쇼카 손주쿠라는 학당을 1830~1859년에 걸쳐서 세우고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기도 타카요시 등 메이지유신의 주역들을 가르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