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학연구원 월례세미나 참석자들이 단체사진을 찍고 있다.
한국교회사학연구원 월례세미나 참석자들이 단체사진을 찍고 있다. ©장지동 기자

한국교회사학연구원이 7일 서대문구 연희동 은진교회에서 제258회 월례세미나를 개최했다.

이날 행사 1부 순서에서 예배 설교를 맡은 김동석 박사(맏힘연구원 원장)는 ‘역사의 신포도’(에스겔 18:1~9)라는 주제로 설교했다. 김 박사는 “적극적으로 정의와 선을 행하고, 나아가 하나님의 율법과 뜻을 찾아 가야한다”고 말했다.

한국교회사학연구원 월례세미나에서 학술 발표를 하고 있는 박형우 박사.
한국교회사학연구원 월례세미나에서 학술 발표를 하고 있는 박형우 박사. ©장지동 기자

2부 순서에는 박형우 박사(연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가 ‘올리버 R. 에비슨의 선교 청사진’이라는 제목으로 학술 발표를 했다.

박 박사는 “1893년 내한해서 1935년 귀국할 때까지 42년 동안 미국 북장로교회의 의료 선교사로 활동했던 올리버 R 에비슨(1860~1956)은 한국의 서양 의학과 고등 교육의 정착에 큰 기여를 했던 인물”이라며 “특히 미국의 개신교회가 해외 선교를 위해 앞세웠던 ‘의학과 교육’ 이 두 분야에서 기여했고, 개화기의 한국 사회에서 다방면으로 비중 있는 영향을 끼쳤다”고 했다.

이어 “이 당시 한국에서 활동했던 선교사들 중에 ‘명예로운 정년’을 맞이했던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며 “1936년까지 활동했던 북장로교회 해외선교본부의 선교사 중에서도 정년을 했던 사람은 에비슨 이외에 7명뿐”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에비슨이 의료와 교육에서 뚜렷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바탕은 선교에 대한 그만의 어떤 ‘청사진’, 즉 일종의 계획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며 “그 청사진에는 자신이 제어할 수 없는 집안 및 교육배경, 사회 활동을 하면서 지인들로부터 받은 모종의 영향과 선교 현장에서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보였던 여러 흔적들이 포함된다. 그가 거두었던 성과를 제대로 이해 하려면 청사진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또 “에비슨은 생전에 회고록을 썼지만, 타자본이었고 정식으로 출판되지는 않았다”며 “에비슨의 관한 연구는 대부분 그의 회고록에 근거 하기에 회고록을 통해 청사진의 한 측면에 덧붙여 그가 선교본부로 보낸 편지 등을 중심으로 선교 현장에서 그가 현지 상황에 맞게 어떻게 청사진을 그려 갔는지 살펴보고자 한다”고 했다.

그는 “에비슨은 1860년 6월 30일 영국 요크셔의 ‘재거 그린’이라 불리는 작은 마을에서 방직공장 마감부의 책임자 아들로 태어났고, 그의 가족들은 감리교회에 출석했다”며 “에비슨은 어린 아이 때부터 침착한 성격이였고, 훗날 휘그당원(자유당원 혹은 개혁당원)이 되어 자유무역주의를 철저히 지지 했는데 이것이 정치적 및 경제적 관념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고 했다.

이어 “에비슨 집안은 감리교회를 다녔지만, 여러번 이사를 다녔고, 감리교회가 없을 때는 회중교회나 미국 성공회 교회를 다니기도 했으며, 후에 그가 속해 있던 교단(캐나다 감리교회)이 그를 선교사로 파송하지 않자, (미국)장로교회의 후원 하에 한국선교를 나갔다”며 “이는 에비슨의 연합 정신과 관련된 중요한 대목”이라고 덧붙였다.

박 박사는 “의과대학 시절 에비슨에게 선교사로서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는 몇 가지 일이 있었다”며 “먼저 1885년 7월 28일 평생의 반려자 ‘제니’와 결혼을 했고, 그의 선교생활을 도왔다. 그리고 결혼한 직후인 1885년 12월 토론토 의과대학과 트리니티 대학교 의학부 학생들이 함께 모여 의과대학 기독교 청년회를 구성, 그 당시 의과대학생의 음주 문제를 바로 잡고자 성공회 교구 금주협회를 바탕으로 1886년 11월 3일 ‘의과대학생 금주연맹’을 조직했다”고 했다.

아울러 “의과대학 교수 시절 토론토 의과대학생 기독교 학생회 선교부가 1890년 여름 로버트 A. 하디를 한국으로 파송하자, 선교부 명의로 월간 잡지 ‘더 메디컬 미션 미셔너리’를 창간, 공동 편집장을 맡아서 선교사 하디의 활동을 알리고, 그를 후원하기 위한 기금 모금을 진행했으며, 교회 활동으로도 ‘토론토 시 기독교 청년회 중앙회’의 의학 임원 및 이사로서 활발한 활동을 했다”고 부연했다.

그는 “1892년 9월 장로교회 연맹 총공의회가 토론토에서 개최됐고, 거기에서 한국 장로교회 목사 일을 시작했던 호러스 G. 언더우드를 만나 해외 선교의 권유를 받고 결심을 했지만, 정작 소속 교단(캐나다 감리교회)은 관심이 없었다”며 “미국 북장로교회 해외선교본부 총무로 있던 프랭크 F. 엘린우드를 만난 에비슨은 장로교회로 교적을 옮기게 된다. 이것은 ‘교파를 초월한 교회 연합’에 대한 그의 생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강조했다.

이어 “한국 선교 사업으로 미국 북장로교회 해외선교본부의 결정으로 1893년 11월 ‘제중원’을 맡아 이 곳을 중심으로 의료 선교 사업을 구상했다”며 “현재 우리나라 의료 전달 체계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중앙병원’을 먼저 구상했고, 그 다음으로 병원 업무 세분화 및 전문화로 인한 능률향상과 더불어 선교적 이점을 살리는 ‘연합병원’을 구상했다”고 덧붙였다.

박 박사는 “에비슨처럼 한국에서 활동한 주요 교파를 아울러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며 “에비슨은 캐나다 의료계의 중추적인 인물로서, 교수 내지 의사로서의 활동 이외에도 기독교와 관련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사회적 위치를 굳혔으며 선교에 있어서 풍부한 교육 경험과 안정된 가정의 중요성을 강조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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