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JTBC에서 방송 중인 <아내의 자격> 안판석 연출, 정성주 극본 /김희애, 이성재 주연.

서래는 부엌에서 찌개를 끓이고 설거지를 하면서 아들의 수학문제를 읽느라 바쁘다. 엄마가 이렇게 문제를 내는 동안 아들(한결)은 밥을 먹으며 머릿속으로 문제를 푼다. 그러는 동안 가스레인지 위에서는 찌개가 끓어 넘치고, 서래는 아까 읽었던 수학문제를 또 읽는다. 엄마가 헤매는 동안 아들은 잘 알아듣고 문제를 맞춘다. 아들이 영특하고 대견한 엄마는 아이를 껴안지만 그러다 우유가 엎어지고…… 이렇게 숨가쁜 날들이 이어진다. 아이가 학교에 가면 서래는 혼자 싱크대 앞에 서서 파를 다듬는다.

<아내의 자격>은 자연주의식 교육을 고집한 서래가 교육특구인 강남으로 이사하면서 겪는 다양한 일들을 보여준다. 어려서 많이 아팠던 아이 때문에 그녀는 주입식, 강압식 교육보다는 폭넓은 독서와 다양한 체험으로 아들이 스스로 사고하도록 도와준다. 그러나 이런 방법이 대한민국 입시에 먹힐 리 없다. 시댁 식구들이 대부분 공부를 잘한 엘리트였기에 시부모가 손자에게 거는 기대는 만만찮다.

이런저런 압박에 결국 서래는 한결을 국제중에 보내려고 지선학당이라는 최고의 사교육 기관을 찾는다. 하지만 이 학원에도 엄연한 '입학' 시험이 있다. 한결은 이 시험에서 떨어진다. 명문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명문학원 시험을 봐야하는 현실. 이것은 드라마의 일부일 뿐이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있는 동안 엄마들은 까페에 모여 정보를 교환하느라 바쁘다. 승용차로 로드매니저가 되는 것은 물론, 서래는 직접 한결의 복습과 예습까지 맡는다. 아들의 성적향상을 위해 아이가 자신에게 설명하는 수학문제나 과학지문을 듣는 서래.

비록 꼴찌로 떨어졌지만 아들이 지선학당에서 공부할 수 있게끔 그녀는 강남에서 반찬가게를 하는 동생의 인맥을 총동원해 학원원장인 지선의 뒷조사에 착수한다. 그러다 지선이 매일 아침마다 유도를 하는 것을 알고 직접 찾아가 다시 한번 기회를 달라고 부탁한다. 언젠가 배낭여행을 가겠다는 목적으로 알음알음 모은 돈을 다 출금한 통장까지 보여주는 서래. 그런 서래에게 마음을 연 지선은 '이곳에선 엄마가 버텨야 애도 버틴다'며 함께 유도를 하고 친구가 된다.

이쯤되면 서래를 극성엄마라고 폄하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녀는 누구보다도 아이를 자유롭고 창의적으로 키우고 싶었다. 이 나라에 살면서 법을 무시할 수도 없고, 어디 한번 잘 해보자는 마음으로 그녀뿐만 아니라 일가족이 고행길에 나선 것이다. ‘중2병’이란 신조어가 생기는 나라. 명문대에 들어가기 위해 명문고에 진학하고, 그러기 위해 명문중학교도 모자라 그곳 진학률이 높은 학원시험까지 준비하는 현실. 완벽한 대비를 위해 학원시험을 위한 개인과외까지 받는 일이 현재 강남이나 목동에서는 비일비재하다. 한 마디로 여기는 노는 물이 다르다.

▲ 서래와 태오는 획일화된 교육특구 강남에서 예외적인 인물들이다.

살인적인 일정에 숨이 막히는 서래는 이곳에서 치과의사인 태오를 만나 호감을 갖는다. 태오 역시 서래처럼 자연스러운 것을 좋아하는 꾸밈없는 사람이다. 외적인 조건보다는 내적인 공감을 중시하는 그들은 서로에게 이끌린다. 그러다 치매로 요양 중인 서래 어머니의 치아관리를 위해 함께 왕진을 간 서래와 태오는 서로의 감정을 확인한다. 그러나 이런 사랑의 예감도 서래의 극성스럽고 깐깐한 시누이에 의해 곧 발각된다. 그리고 지선도 이들의 연애를 눈치채면서 드라마는 빠른 호흡으로 전개된다.

이 드라마에서 가장 신선한 부분은 서래를 연기하는 김희애의 감정선이다. <내 남자의 여자>에서 뻔뻔하고 도발적으로 친구의 남자를 탐하는 ‘화영’을 연기한 그녀는 이 작품에서는 완전히 다른 인물을 소화한다. 똑같은 형태의 사랑에 빠지는 여성이지만 정반대의 근육을 이용해서 ‘화영’의 기시감을 말끔하게 지운다.

▲ 태오에게 이끌리는 자신의 감정 때문에 당혹스러운 서래.

이 극에서 서래의 가장 큰 특징은 이중성이다. 아이의 행복을 바라지만, 아들이 경쟁에서 낙오되는 것은 원치않아 강남식 교육을 선택하는 그녀. 남편의 경제력에 기대어 시댁의 일원이 되지만 그녀는 남편을 경멸한다. 만취한 남편이 침대에 드러누워 자신의 손을 잡아끌며 술집 여자 대하듯 흥얼거릴 때 서래는 나도 인간이고, 여자라며 치를 떤다. 하지만 이 감정조차도 그악스러운 것이 아닌 지극히 내성적인 울음에 가깝다.

서래는 태오의 만남에 설레이고 그의 사랑을 원한다. 시어머니보다도 절대적인 원장 지선의 부름까지 거절하며 그녀는 태오를 만나러 빗길을 내달린다. 내가 미쳤다고, 아이를 국제중에 보내려고 여기까지 왔는데, 그 아이를 책임지는 선생까지 내팽개치고 당신에게 달려왔다며 서래는 혼란스러워한다.

많은 영화들이 다루는 결혼 이후의 사랑은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영화나 <아내의 자격> 모두 두 남녀를 빗속에, 자동차 안에 둔다. 이 폐쇄된 공간은 '시선은 권력이다'는 말처럼 이들에게 가장 불편하고 두려운 타인의 시선을 차단한다. 비는 연인의 사랑이 더욱 깊어지게 하고, 새로운 감정을 환기하며 사건의 전환점이 된다.

▲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The bridges of Madison County, 1995)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 메릴 스트립 주연. 로버트 제임스 월러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연출과 연기에 능한 자신의 재능을 보여준다. 메릴 스트립의 섬세한 연기가 돋보이는 수작.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에서 사진작가 로버트(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떠나는 순간, 다시 한번 프란체스카(메릴 스트립)를 붙잡는 신호로 그는 그녀가 탄 차 뒤에서 경적을 울린다. 이때 그녀는 남편과 함께 차 안에 있다. 그때 정지신호가 걸리고 그들의 차는 각각 앞뒤에 서있다.

남편은 무슨 비가 이렇게 많이 오냐며 투덜대고, 프란체스카는 백미러로 로버트의 차를 보며 망설인다. 지금 여기에서 내릴까. 다시 그에게 갈까. 그녀는 이렇게 고민하다가 차문을 열려는 찰나 신호가 바뀌면서 차는 방향을 튼다. 그때 프란체스카는 허물어지듯 조수석 구석에 몸을 묻고 고개를 돌려 흐느낀다. 로버트는 완전히 떠났고 프란체스카의 격정은 가라앉지 앉는다. 우는 아내를 보며 그 이유를 모르는 남편은 라디오의 볼륨만 높인다. 그렇게 두 사람은 헤어진다.

프란체스카는 자신이 가정을 뒤로 하고 로버트에게 갔다면 두 사람이 공유한 감정 또한 변하리란 것을 알았기에 사랑 대신 희생을 선택한다. 자신의 삶을 위해. 함께 남아있을 가족을 위해. 무엇보다도 예외적인 이 사랑의 소중함을 지키기 위해서. 식상한 표현같지만 중요한 것은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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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자격 #매디슨카운티의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