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흐 고갱 그리고 옐로하우스』 마틴 게이포드 지음, 김민아 옮김/ 안그라픽스, 18000원.

네덜란드 프로트 즌델트에서 태어난 고흐는 프랑스 오베르에서 사망하기까지 37년 동안 여러 편의 그림을 그렸다. 그를 다룬 책이나 영화는 꾸준히 나오고 있지만 가장 대중적인 책을 꼽자면『반 고흐 영혼의 편지』다. 이 책이 고흐와 테오의 관계를 조명한다면,『고흐 고갱 그리고 옐로하우스』는 고흐와 고갱의 이야기를 본격화한 논픽션이다.      

『반 고흐 영혼의 편지』는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들을 모은 책이다. 그래서 책을 읽으면 '테오에게'로 시작하는 많은 글들이 에코처럼 울려 퍼진다. 책에는 테오와 편지를 주고 받았던 당시, 고흐가 그렸던 그림들이 수록되어 있다.

『고흐 고갱 그리고 옐로하우스』는 고흐가 동료화가 고갱과 함께한 시간들을 중점적으로 다뤘다. 여기에서 옐로하우스는 우리말로 직역하면 '노란집'으로 고흐의 작업실이다. 이 책은 굉장히 두꺼운 양장본이지만 금방 읽힌다. 안정적이고 명쾌한 문체로 저술한 마틴 게이포드의 노련함 때문이다. 옐로 하우스에서 고흐는 가장 행복했으며 자신의 대표작들을 그렸다. 그리고 이 부분을 확대한 영화가 빈센트 미넬리, 조지 큐커 감독의 <열정의 랩소디>다.

▲ <열정의 랩소디 Lust for life 1956> 빈센트 미넬리, 조지 큐커 감독/ 커크 더글라스, 안소니 퀸 주연. 고흐 역을 맡은 커크 더글라스는 이 영화로 제14회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을 받았으며, 고갱을 열연한 안소니 퀸은 제29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

목사에서 화가로 진로를 전환한 고흐의 삶을 다룬 <열정의 랩소디 Lust for life 1956>는 중반부의 흡입력이 상당한 영화다. 고흐의 가장 내밀한 이야기는 고갱과의 만남에서 시작한다. 고갱은 고흐와 반대였다. 외견상 고흐가 정적이고 성실한 화가라면, 고갱은 성정(性情)이 불같고 영감에 의지하는 화가다. 고흐의 그림이 살아있는 것 같은 생생함과 광기로 일렁인다면, 고갱은 절제와 평온 속에서 독특함을 확보하고 있다. 옐로 하우스에 처음 온 고갱은 고흐가 그동안 그린 많은 작품들을 보고 머뭇거린다. 이 위화감은 경악이 아닌 질투다. 고갱은 고흐의 집요한 열정을 경계한다.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 고갱은 이런 환경에서 일을 못한다며 격분하지만, 고흐는 캔버스 다리에 못을 박으며 끝까지 그림을 완성한다. 작업에 몰입하면 주변 환경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고흐와 달리 고갱은 작업실이 정돈되어야 일을 할 수 있다. 그들은 격렬하게 싸우고 화해하며 같이 있지만 최소한 고갱에게는 한계가 있었다. 이 둘의 만남에서 파국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고갱은 고흐가 자신을 미치게 만든다고 의심한다. 이 불안은 확신으로 굳어지며 결국 고갱이 옐로 하우스를 떠나게 한다. 그런 고갱을 가로막으며 고흐는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외로웠는지 아느냐고 호소한다. 그러나 고갱은 차갑게 대꾸한다. "넌 노동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하지만 노동은 전혀 그렇지 않아. 너는 노동을 해 본 적도 없잖아? 나도 너만큼 외롭지만 너처럼 징징대지는 않아."

고흐는 면도칼을 들고 거리를 걷는 고갱의 뒤를 쫓는다.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고갱의 눈. 그 눈에서 빛나는 차가운 모멸과 적대감에 고흐는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자신의 방에서 거울을 보며 울부짖는다. 그는 고갱에게 겨누었던 면도칼로 자신의 귀를 자른다.

이 시점에 고흐의 후견인이자 동생이었던 테오가 부재한 것은 그가 고흐의 행복을 믿었기 때문이다. 테오는 고흐가 화가가 된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후원자이자 피를 나눈 동생이었다. 고흐가 힘들어 할 때마다 테오는 편지와 함께 돈을 동봉해 보냈으며, 형의 그림이 나아지고 있다는 격려도 잊지 않았다.

테오는 그 누구보다도 고흐의 행복을 기원했다. 그래서 고흐의 작품을 단 한 점이라도 팔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하지만 거칠고 무례했던 고흐는 점점 더 광적인 사람이 되었고, 그 과정에서 자신을 파괴하며 창조를 거듭한다. 고흐의 삶은 가난과 갈등의 연속이었다.   

▲ '슬픔', 석판화, 38.5×29㎝, 1882년, 반 고흐 미술관, 암스테르담.

고흐가 권총으로 자살시도를 하기 전에 까페에 앉아 있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광장에서는 축제가 한창이다. 웃고 춤추며 행복의 절정에 있는 대중 속 고흐는 혼자 구석진 자리에 있다. 그는 머리를 감싸 쥐며 울먹이다가 고개를 두 팔 안에 묻는다. 마치 그가 그렸던 <슬픔>이라는 소묘 속 여자처럼. 그때 분홍색 원피스를 입은 어린 소녀가 고흐에게 와인 한 잔을 준다. 고흐는 소녀의 걱정과 배려가 담긴 유리잔을 의식조차 하지 못한다. 고흐의 거친 몸짓에 유리잔은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난다.

이 유리파편은 고흐의 관계성을 의미한다. 그는 어디에도 마음 두지 못한다. 그의 마음을 억누를 수 있는 극진한 것은 오직 그림뿐이었기에. 결국 고흐가 자신의 심장을 향해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던 것도 그 그림 때문이었기에. 뒤늦게 화가가 된 고흐에게는 확신과 인정이 필요했지만 대중은 자신이 누리는 행복의 일부도 고흐에게 주지 않는다.

한 사람으로 고흐를 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의 화폭에 담긴 이 도저한 노랑을, 금방이라도 타오를 것처럼 이글거리는 강렬한 색의 질감을 본다면 고흐가 왜 그토록 괴로워했는지 조금은 알 수 있다. 이 노랑을 가슴에 품고 어떻게 살아갈 수 있었는지. 그런 그를 생각하면 슬픔에 고개를 묻고 있는 여자와 감자를 먹는 사람들의 거친 손과 낡은 구두 한 켤레에 깃든 공허를 오래도록 응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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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 #3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