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철 교수   ©스피커코리아

공관복음이라고 불리는 마태, 마가,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의 초점은 모두 '예수'이지만 각 복음서의 기자가 본 '예수'와 예수의 열두 제자에 대한 인식에는 차이가 있다.

12일 열린 한국신약학회 제105차 정기학술대회에서 발제한 김학철 교수(연세대)는 '나는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않았다. 그리고 너희 중에 하나는 악마다'(요 6:70b-c)를 주제로 발제하며 공관복음과 차이가 나는 요한복음의 관점들을 언급했다.

먼저 그는 "이 구절(요 6:70b-c)은 거의 모든 학자나 번역본은 이 구절을 공관복음의 열둘에 관한 전승에 따라 번역하고 이해하지만 이 문장의 구두점에 관해서는 다소 의견이 나뉜다"며 "어떤 번역은 쉼표(,)를 '?ξελεξ?μην'를 앞에 두고 '?στιν'다음에 물음표(?)를 놓는다(UBS3, KJV, NKJV, NASB, NASU 등). 또 다른 번역은 물음표를 가운데 두고, 마침표를 문장의 마지막에 둔다(NA27, NRSV, ESV, Schlachter 등)"고 했다.

김 교수는 "구두점을 찍는 크게 두 가지 방식이 있지만, 두 독법 모두 그 문장에 물음표가 필요하다는 데에는 동의한다"며 "'o?κ'로 시작하는 의문문은 긍정적인 답변을 기대하는 것이기에 물음표가 있는 그 문장은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않았는가? 맞다. 내가 너희들을 택하였다'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그는 "결과적으로 구두점을 찍는 두 방식이 있다 하더라도 두 독법 모두 예수가 열둘을 택했다는 전제를 가진다"고 했다.

그러나 그 '열둘'에 관한 묘사가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은 좀 다르다고 소개했다. 그는 "공관복음 저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모두 열둘이 특권과 '사도'라고 불리는 명예를 가지고 있었다고 묘사한다. 나아가 모두 똑같지는 않지만 열둘의 명단 또한 기록한다(마 10:2-4; 막 3:16-19; 눅 6:14-16)"며 "그러므로 공관복음의 독자들은 예수가 특권을 가진 그룹으로 열둘을 선택했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요한 저자는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을 알았고, 열둘에 대한 공관복음 전승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전승을 그대로 옮기지 않는다"며 또 "요한은 열둘을 '사도'라고 부르지 않는다. 또 열둘의 명단도 나오지 않고 대신 열둘 가운데 다섯 혹은 여섯 명의 제자만(베드로, 안드레, 빌립, 토마, 가룟 유다, 야고보의 아들 유다)이 소개될 뿐이다"고 말했다.

왜 요한복음은 열둘에 관한 공관복음 전승을 따르지 않을까? 마이어(John P. Meier)는 "단지 요한이 열둘로 불리는 그룹에 특별한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김 교수는 또 '요한의 예수'에 두드러진 신적 영광과 권위의 두드러짐을 설명했다. 그는 "요한의 기독론과 공관복음의 기독론 사이에 차이가 있음은 잘 알려져 있다"며 "요한의 예수는 공관 복음의 예수보다 보다 큰 신적 영광과 권위를 드러낸다"고 했다.

그는 "그러한 요한의 예수의 특징 가운데 예수의 선(先) 지식과 자신의 뜻과 계획에 따라 상황을 통제하는 능력이 두드러지게 강조된다"며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실수를 저지르지도 않고 당황하거나 무서워 하지도 않는다"고 했다.

"심지어 죽음에 직면해서도 그러하다. 공관복음의 예수와 달리 요한의 예수는 겟세마네에서 절망이나 비탄에 잠기지 않는다(12:27-33. Cf. 마 26:36-46; 막 14:32-42; 눅 22:39-46). 가룟 유다와 그가 이끄는 무리가 왔을 때도 예수는 이 모든 일이 일어날 줄 미리 알고 도리어 그들 앞으로 나아간다(18:4). 예수는 당황하지 않는다. 도리어 예수를 찾아서 체포하려는 이들이 당황한다. 예수가 자신을 신적 자기 확인인 "?γ? ε?μι"로 답변하자 그들은 뒤로 물러나 땅 바닥에 쓰러진다(18:6). 요한의 예수는 누구에게도 살해당하지 않는다. '누구도 내게서[예수] 이것을[ψυχ?] 빼앗지 못한다. 다만 나는 그것을 내 뜻대로 내러놓는다. 나는 그것을 내려놓을 권세도 있고 그것을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10:18). 요한의 예수는 결코 자신의 목숨과 죽음에 관한 통제권을 잃지 않는다. 심지어 십자가 위에서도 그는 '다 이루었다'("τετ?λεσται" 19:30)고 선언한다."

김 교수는 또 "요한의 예수는 사람 속에 있는 것도 안다(2:25. Cf. 6:15, 64; 16:9).18). 가령 요한의 예수는 나다나엘을 만나기 전부터 그를 알고 있었다(2:48)"며 "열둘 중 하나인 유다도 예외가 될 수 없다(6:66-71)"고 했다.

이어 "그는 처음부터 그가 선택한 사람을 안다(6:64; 13:18). 그리고 자기 백성을 선택하는 데 완전한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고 천명한다"며 "만약 예수가 택하지 않았다면 아무도 그의 제자가 될 수 없다"며 '너희가 나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선택했다'(15:16)는 구절을 인용했다.

또 김 교수는 "마태와 누가가 유다의 배신과 죽음 이후 '열둘'을 '열하나'로 바꾸는 반면(마 28:16; 눅 24:9, 33),21) 요한은 계속해서 그들을 '열둘'로 부른다"는 점도 언급했다.

그는 "이것은 가룟 유다를 뺀'열하나'로 고쳐 부르며 나머지 '열하나'에 대한 부정적 함의를 제거하려는 마태와 누가의 시도를 거스르는 것이다"며 "다시 말해 요한은 가룟 유다가 없는데도 '열둘'로 부르면서 하나의 그룹으로 '열둘'에 쓰인 부정적 뉘앙스를 덜어내지 않는다(20:24)"고 말했다.

또 요한복음 6장67절에서 '너희도 가려느냐'는 예수의 질문에 베드로가"주님 우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은 영생의 말씀을 가졌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임을 믿고 알았습
니다"(6:68b-69)라고 답한 것을 언급하며 "이것은 요한복음에 나온 유일한 베드로의 '고백'이다"고 했다.

그는 "크랜필드와 하비(C.E.B. Cranfield and A.E. Harvey)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이 특별히 예수 의 신성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며 "도메리스(William R. Domeris)는 이 칭호가 일차적으로 대표자나 대행자를 뜻한다고 설명하면서, '마가와 누가의 경우 이것은 악마에 대한 심판자를, 요한의 경우에는 예수가 생명의 수여자임을 뜻한다'고 주장한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잘 알려져 있듯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이라는 칭호는 신약 전체에서 오직 세 번만 예수에게 적용된다"며 "요한복음을 제외하고는 오직 악마만이("πνε?ματι ?καθ?ρτ?" 막 1:23; "πνε?μα δαιμον?ου ?καθ?ρτου" 눅 4:33) 그 칭호로 예수의 정체를 누설한다"고 했다.

그는 "신약학자들은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을 이미 알고 있었던 요한 저자가 하필이면 왜 이 칭호, 곧 악마에 의해 오염된 칭호를 사용하여 열둘의 대표자로 나선 베드로가 고백하도록 했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어 김 교수는 "공교롭게도 요한은 예수가 베드로의 고백을 수용하거나 격려하지 않고, 도리어 열둘을 향해 '너희 중에 하나는 악마다'(6:70c)고 선언했다고 기록한다"며 "그러나 요한은 독자들에게 이내 악마가 '시몬' 베드로("Σ?μων Π?τρο?," 6:68)가 아니라 '시몬(의 아들)' 유다("?ο?δαs Σ?μωνο?")라고 밝힌다"고 했다.

그는 "우리는 여기서 요한이 '시몬'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흥미로운 방식으로 말놀이하는 것을 볼 수 있다"며 "복음서 저자 중에 오직 요한만이 유다를 '시몬(의 아들)' 유다로 소개한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요한은 '시몬 베드로'와 '시몬 유다'를 두 이야기 단락에 걸쳐 함께 언급하는 데, 교묘하게 그 이름을 섞고 있다(6:68-71; 13:2, 6, 9, 24, 26).33)"며 "요한은 시몬 베드로가 아니라 시몬 유다가 악마라고 독자들이 할 만한 오해를 이내 교정한다. 그러나 요한의 미묘한 이름 엮기와 이야기 방식은 베드로와 열둘에게 미심쩍은 뉘앙스를 남긴다"고도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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