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진 교수(장신대 기독교교육)
박상진 교수(장신대 기독교교육)
©신광두레교회 영상 캡처

신광두레교회에서 지난 19일 오후에 진행된 교사헌신예배에서 박상진 교수(장신대)가 다음 세대를 살리는 좋은 교사(막 6:34)라는 제목으로 메시지를 전했다.

박 교수는 “한국교회의 가장 심각한 위기를 하나만 꼽으라고 한다면 다음 세대의 위기다. 이제는 다음세대의 위기라는 말 대신 소멸이라는 말을 쓴다. 지난 10년 사이에 40%나 감소한 교회학교 학생 수가 코로나 이후 대면 예배 회복률 43%로 반토막에서 또 반토막이 났다. 다음세대가 주역이 될 한국교회가 지속 가능할지 심각한 우려가 있다”며 다음 세대의 위기를 진단했다.

그러면서 “다음 세대를 살리는 두 기둥이 있다. 하나의 기둥은 부모, 다른 하나의 기둥은 교회학교 교사다. 부모는 가정에서 신앙의 교사가 돼야 하고, 교회학교 교사는 부모 같은 교사가 돼야 한다”고 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코로나 기간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교육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셨다. 부모가 신앙교사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부모가 자녀를 가르치지 않고 보내는 사람으로 전락해 버렸다. 신앙적 자녀 교육이 없는 부모는 교회를 다닌다고 하더라도 교회 다니는 부모에 불과하다. 세속적인 교육을 받는 자녀는 세속적인 길을 갈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스스로 결정할 때가 되면 교회를 떠나게 된다“며 ”한국 교회에 제2의 거듭남 운동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어 “첫 번째 거듭남은 부모가 예수를 믿는 것이고, 두 번째 거듭남은 자녀 교육에서 예수를 믿는 것이다. 자녀 교육이 거듭날 때 비로소 진정한 크리스천 부모가 되는 것”이라고 했다.

박 교수는 “예수님 당시에도 랍비가 많았지만, 그들에게선 살아있는 교육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놀라운 생명의 역사, 변화의 역사가 나타났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능력의 비결을 본문인 마가복음 6장 34절에서 말씀해준다.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예수님의 가르침은 불쌍히 여김으로부터 말미암는 가르침이었다”고 했다.

이어 “이 ‘불쌍히 여기사’는 헬라어로 ‘스플랑크 니조마이’다. 창자가 끊어지듯이 불쌍히 여기는 것을 일컫는다. 이 단어는 복음서의 세 군데에서 사용된다. 첫 번째는 누가복음 15장 탕자의 비유다.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이것이 교사들이 품어야 할 마음이다. 두 번째 누가복음 10장에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온다. 강도 만난 자를 ‘불쌍히 여겨’가 스플랑크 니조마이다. 강도 만난 자를 살리는 기적을 일으킨 것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불쌍히 여길 때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나온다”고 했다.

이어 “세 번째는 누가복음 7장에 나인성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시는 기적 사건에서 나온다. 예수께서 그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겨 그 관에 손을 대신다. 교회학교에 기적이 필요하다. 기적이 일어나는 비결은 불쌍히 여기사다. 믿는 자들은 안 믿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교사의 역할이 있다. 사람을 살리고 다음세대를 살리는 비결은 ‘불쌍히 여기사’”라고 했다.

그는 “제가 신학대학에서 신입생들 면접을 볼 때마다 내 삶에 가장 영향을 끼친 사람이 누구인지 질문한다. 제일 많이 나오는 응답이 엄마다. 엄마는 불쌍히 여기는 사람이다. 두 번째가 교회학교 교사다. 그런데 모든 교사가 기억되는 게 아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주신 선생님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불쌍히 여김을 경험하면서 삶의 터닝포인트가 일어나게 된 그 선생님은 잊히지 않는 것이다. 우리 신앙의 성숙도를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척도는 얼마나 불쌍히 여기느냐다. 그 불쌍히 여김의 깊이만큼 변화가 일어나고 누군가를 살리고 치유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 불쌍히 여기사 다음에 나오는 단어가 ‘이에’다. 진짜 불쌍히 여겼다면 거기서 끝나지 않고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가 나와야 한다. 너무 불쌍하니까 행동이 따라 나오는 것이다. 저는 이 여러 가지라는 단어에 도전을 받았다. 예수님도 한 번에 끝내신 게 아니라 이런저런 모양으로 가르치셨다. 진정 불쌍히 여긴다면 한 번으로 끝내지 말고 여러 가지로 해야 한다. 코로나를 겪으면서 온라인이냐 오프라인이냐의 논쟁이 생겼다. 그런데 사실 이 문제보다 더 중요한 건 진짜 불쌍히 여기느냐, 진짜 사랑하느냐의 문제다. 정말 불쌍히 여긴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있다”고 했다.

박 교수는 “기독교 교육의 원형은 주일학교가 아니다. 기독교 교육의 원형은 성육신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선택하신 교육의 방법은 성육신하셔서 인간이 되신 것이다. 이게 하나님의 교육이다. 2023년 교회학교 교사들이 아이들을 불쌍하게 여겨봤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어 불쌍히 여길 방법으로 “첫째, 숫자를 보지 말고 사람을 봐야 한다. 숫자를 보는 순간 사람을 놓친다.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긴다. 기독교 교육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정확하게 사랑의 대상을 확정하고 승부를 거는 것이다. 그래서 제일 중요한 교회학교 교사의 책임은 나의 제자로 확정하는 것이다. 저는 이것을 닻을 내린다는 표현을 했다. 교사들이 사랑의 대상을 확정하고 그다음 집중적으로 사랑해야 한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집중적인 사랑이다. 흩뿌리는 사랑으로는 아무도 변화시킬 수 없다”고 했다.

이어 “두 번째, 진실을 볼 때 불쌍히 여길 수 있다.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셨다. 교회학교 교사들의 실패 원인 중 하나는 아이들의 진실을 보지 못해서다. 목자 없는 양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먹을 것을 먹지 못해서 기진맥진한다. 또 언제든지 맹수한테 공격당할 수밖에 없다. 지금 아이들이 그렇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영의 양식이 없어서 기진맥진한다. 그리고 클릭만 하면 범죄가 솟구쳐 나온다. 아이들은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 있다. 아이들의 진실을 봐야 한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만나야 한다. 구경하면 안 된다. 예수님께선 수가성 여인을 만나서 그 여인의 중심을 터치하셨다. 관계에도 차원이 있다. 표피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교사는 아무도 변화시킬 수 없다. 일주일 동안 기도도 안 하고 주일 오전에 분반 공부 11분 잠깐 만나는 것으로는 아무도 변화시킬 수 없다. 랍비라는 호칭은 있지만 무기력한 교사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어 “관계에 깊이가 있는 교사는 주일 아침에만 잠깐 만나는 게 아니라 주중에 한 번 더 만나는 교사다. 가정 심방이 중요하다. 이게 물리적 공간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영적 공간, 심리적 공간이 되는 것이다. 가정 방문을 하면 아이는 스스로 무장해제를 하고 마음을 내미는 옥토에 뿌린 씨앗이 된다. 내면을 변화시키고 영혼을 변화시키고 다음 세대를 살리는 교사가 되기 위해선 삼인칭이 아니라 이인칭으로 만나야 한다. 나와 그것들이 아닌 나와 너의 인격적인 만남으로 만나면 껍질이 아닌 내면으로 만나게 되고, 중심의 변화, 생명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고 했다.

박 교수는 “사람을 변화시키고 살리는 능력은 다른 게 아니다. 불쌍히 여기는 능력이다. 그렇다면 제일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불쌍히 여김을 받은 존재인가를 깨닫는 것이다. 다시금 십자가 보좌 앞으로 나아가기를 바란다. 그 주님의 십자가 구속의 은총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그 주님의 불쌍히 여김으로 적셔진 다음에 그 불쌍히 여김이 넘쳐흘러서 누군가를 불쌍히 여김으로 다음세대를 살리고 생명을 변화시키는 교사들이 되기를 원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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