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11일 신년사에서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향해 “언제든 어디서든 만나고 비대면 방식으로도 대화할 수 있다”고 했다. 코로나19 때문에 어려우면 ‘비대면’으로라도 만나자는 것은 어떤 상황이라도 북한을 향한 뜨거운 가슴이 식지 않았음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문 대통령의 절절한 ‘사랑가’에 북한은 ‘핵무장’으로 화답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지난 9일 공개된 8차 노동당 대회 사업총화 보고에서 남북관계 악화의 책임을 한국에 돌리면서 “핵무기의 소형·경량화, 전술 무기화를 보다 발전시키라”고 지시했다. 그가 언급한 전술 핵개발은 다름 아닌 대한민국을 직접 겨냥한 것이다.

이전의 북한 노동당 규약은 핵무기를 ‘자위적 전쟁 억제력’으로 기술했었다. 그러나 김정은은 이 규약마저 ‘조국통일 과업을 이룰 공화국 무력’으로 바꿨다. 그리고 남한 정부를 향해서는 첨단군사장비 반입 및 한·미 연합훈련 중단을 요구하고, 미국을 향해서는 대북 적대 정책을 철폐하면 관계 정상화를 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한 줄로 요약하면 한·미 동맹을 파괴하고 핵무기로 적화통일을 이루겠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문 대통령은 “남북 협력만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이 많다”며 코로나 방역 협력을 통한 상생과 평화의 물꼬를 기대했다. 북한은 문 대통령의 이런 제안을 불과 이틀 전에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김 위원장이 “현재 남조선 당국은 방역 협력, 인도주의적 협력, 개별관광 같은 비본질적인 문제들을 꺼내 들고 북남관계 개선에 관심이 있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며 우리 정부에 면박을 준 것이다.

상대가 콕 찍어서 싫다고 한 것을 이틀 만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언급하는 문 대통령의 신년사를 국민들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참으로 난감하다. 상대가 뭐라 하든 ‘마이동풍’ ‘동문서답’으로 내 할 말만 할 요량인가.

더군다나 북한이 전술핵무기 개발에 전력을 다하겠다고 선언한 것은 대남 선전포고나 마찬가지다. 미국 본토가 아닌 남한 전역을 겨냥한 소형 핵무기로 대놓고 협박한 것이다. 그런데도 군사적으로 대치중인 나라의 군수통수권자인 대통령이 “경고망동하지 말라”는 말 한 마디 없이 ‘평화’ ‘상생’을 외치고 있으니 뜬금없다. 상대로 하여금 군사적 오판을 방기하는 것이나 다름없어 위험하다. 미국과 국제사회에는 한국정부가 북한의 핵개발을 사실상 묵인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돼 북핵 문제 해결에 있어 우리의 입지가 좁아질 수 있다.

정부는 문 대통령의 재임 업적 중 남북관계 발전을 첫 번째로 내세우고 싶어 한다. 그런 만큼 4.27 판문점회담과 평양 방문, 싱가포르 미북회담 등으로 이어지던 밀월관계가 하노이 미북회담 결렬로 사실상 원점으로 돌아갔음에도 아직 마땅한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은 현 정부로서도 뼈아픈 대목이다.

그런 상황에서 문 대통령이 해마다 김정은 위원장의 답방을 조르는 듯한 모습이 좋게 보일 리 없다. 부동산 정책 실패에다 코로나 장기화에 따른 피로도에 시달리는 국민들은 안중에도 없는 듯 김정은 위원장의 서울 답방 카드를 청와대와 여권이 다시 꺼내는 것은 그만큼 초조하고 절박하다는 뜻이다.

대통령비서실 국정기획실장 출신의 윤건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10일 방송 인터뷰에서 “김 위원장의 답방이 반드시 올해 있어야 한다”며 “의료 지원이나 방역 지원으로는 안 되고 좀 더 미국의 눈치를 보지 말고 과감하게 가보자는 게 김 위원장의 속내”라고 밝혔다. 같은 당 설훈 의원도 “올 여름 쯤 김 위원장의 답방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며 시기까지 특정했다.

여권에서 제기되는 김정은 위원장 연내 답방이 북측과의 모종의 교감을 통해 나온 것이라는 징후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남북관계가 아무리 롤러코스터 같이 한치 앞을 예측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북측의 마음속에 남한 정부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신년 벽두부터 전술 핵무기 운운하며 대남 선전포고를 할 수 있겠는가.

정부의 대북 인식이 과거에 머물러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는 또 있다. “정부 고위 관계자가 11일 곧 출범할 바이든 미 행정부에 ‘싱가포르 정신으로 돌아가 북·미 대화를 재개하자’는 메시지를 전달했다”고 모 신문이 보도했다.

‘싱가포르 합의’란 2018년 6월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간에 이뤄진 정상회담의 결과를 말한다. 그러나 이 합의는 이듬해 2월 베트남 하노이에서의 2차 회담이 결렬되면서 미완의 상태로 남았다. 그러니까 합의했던 때로 돌아가 다시 출발하자는 것인데 바이든 미 행정부가 트럼프의 업적을 승계하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이고 몽상에 가깝다.

문 대통령이 올해도 어김없이 신년사에서 강조한 ‘상생’과 ‘평화’의 소중함을 모를 리 없다. 한반도에 어떤 역경과 위기가 닥치더라도 그 가치를 반드시 지키겠다는 대통령의 결연한 의지를 깎아 내릴 생각도 없다. 그러나 남북이 군사적으로 대치중인 현실에서, 상대는 핵무장으로 적화통일을 공언하고 있는 때에 그런 말을 쏟아낸 들 그냥 화려한 수사(修辭)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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