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복음주의협의회 3월 발표회
민경배 백석대 석좌교수 ©기독일보 노형구 기자

3.1운동과 세계사
일본 아이찌대학 교수 에구찌 규지 교수는 3.1독립운동이 세계 제2차대전의 원인이라고 말한 일이 있다. 간도에까지 확장된 독립운동 때문에 유조구/노구교-만주사변-중일전쟁-대동아전쟁/세계대전, 이런 식으로 확장되었다는 해석이다.

한국교회/ 전국적 조직, 동력 동원통로
 내적 이상과 역량은 동원 통로가 있어서 비로소 치솟고 터진다. 한국교회가 바로 3.1독립운동 때에 그런 전국적 동력 동원체제의 역할을 한다. 한국교회는 선교정책에서 교계예양으로 각 교파가 특정 도를 책임지는 선교정책을 썼기 때문이다. 가령 평안도 황해도는 장로교강원도는 감리고 이널 교계 분담책임제였다. 다른 하나는 교회의 민주주의 대의적 지역대표제로 전국적 조직을 하나로 묶는 정책을 썼기 때문이다. 당회 시찰회 노회 총회, 이런 식으로 전국조직이 체계 상승 구조로 결속되어 있었다.

이러한 전국적 조직이 전국을 망라하고 있었고 바로 그것이 전국의 동력을 동원하는 체제로 역할 할 수 있었다. 민족의 내적 역량과 비전을 밖으로 용출하게 하는 계기와 통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한국교회의 지역정책은 모세5경을 방불하게 하는 것인데, 어떤 영역감, 기지감, 확보감, 책임감을 가지게 하고 있었다. 국토)에 대한 의식과 사랑은 한국 초대교회 때부터의 전통이다. 1907년 윤치호는 <찬미가>를 편집 간행하였는데 거기<동해물과 백두산>이 처음 나온다. 국토다. 그래서 그랬을 것이다. 우리나라 학교 교가마다 산하가 반드시 나온다. 기독교의 영향이다. 1920년 남궁억은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을 불러 전국이 제창한다. 한국교회는 한국 그 지경을 책임져야 한다. 서울, 한국, 아세아, 세계를, 땅 끝까지를 책임져야한다.

3.1독립운동과 한국교회 참여 정도
 3.1독립운동 당시 한국인은 총 1,700만명인데 기독교인 수는 26만명, 전체의 1.5%정도였다. 2016년 통계청에 의하면 현재는 기독교인구가 30%이다.
한데 당시 총독부 공식 발표에 따르면 시위 참여인원이 2백만명, 사상자가 23만4천명, 피살자 7천5백명, 불탄 교회 47동 민가 715채였다. 기소자는 전체에서 기독교인이 25%, 입감자는 기독교인이 1,967명 곧 전체의 15%인데 그중 여자가 176명으로 9%에 이르고 있었다. 기독교입감자 중 여자가 10/1에 이르고 있었다. 전체적으로는 여자 입감자가 3%에 이르고 있었다. 요약하면:
기소자 - 불교 1.4% / 천도교 14.8% 기독교 18.5%: 곧 1/15/19
입감자 - 불교 102/ 천도교 1,322/ 기독교 1,914 : 곧 1/ 13/ 20

지난 2019.02.21 [조선일보]에 따르면 국내외에 참가자 103만명이 시위에 참가했으며, 일제의 탄압으로 최다 934명이 숨진 것으로 집계됐다. 국사편찬위원회(이하 국편)가 20일 공개한 '3·1운동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당시 시위 참가 인원은 최소 80만~최다 103만명, 사망자 최소 725~최다 934명에 이르렀다. 일제의 기존 자료에 기록된 시위 참여자 58만명, 사망자 553명보다 최고 1.7배 높은 수치다.

3.1독립운동의 기독교성
 3.1독립운동 당시 전국에 격문이나 붙었다.
"매일 3시 기도하고 주일엔 금식하고 한주 내내 성경을 계속 읽으라"

그런데 성경은 월요일–토요일 매일 성경 어디를 읽으라는 글이 들어 있었다. 가령 월요일은 이사야 10장 화요일은 예레미아 12장이었다.
이 위대한 성경적 신앙이 3.1독립운동의 근원적 생명이요 그 동력이었다. 3.1독립선언서 작성자 최남선은 독립선언서는 기독교적 입장에서 씌워진 것이라고 천명한 바가 있다. <군국주의 통제>에 대한 대결로서의 민주주의적 이념은 복음과는 결코 떠날 수 없는 가치였다. 더구나 일제는 만세를 외치는 군중들이 <거의 종교적 열광으로 필사적 태도로 하였으며 그것은 기독교의 순교적 열광을 연상케> 한다고 기록하고 있었다. 3.1독립운동은 기독교 역사로 체계화되고 있었다. 당시 일본 신문을 보면 일제 진압자들은 어디가나 교회와 기독교인을 중점적으로 검거하고 교회를 불태우고 있었다.

가령 '미야꼬신문' 3월 8일자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난다. "곧 불량 선인의 소굴이라 일컬어지는 평안남도에서 1일 오후 1시부터 평양 기독교, 교회당과 학교에 약 2천명이 집합하여 손에 구 한국기를 휘날리며 독립만세를 부르짖고, 진남포 안주에서도 수백의 기독교도 집합하여 독립선언서를 살포" 대개 이런 기사다. 기독교가 3.1독립운동 중심에 서 있었다.

3.1 운동의 세계사적 의미
 3.1독립운동은 세계 역사의 조류에 올라 선 거대 운동이었다. 세계 제1차대전의 회생으로 전취한 민주주의, 자유, 인권, 민족국가, 이런 가치들이 일제의 프러시아 군국주의에 의해 한국에서 다시 소생되고 있다는 의식이 한국이나 세계에 편만하고 있었다. 참담하였다.
<독립선언서>의 핵심 주창도 세계사적이었다. 곧 정의, 인도, 인류적 양심의 발로, 세계개조의 대기운, 시대의 대세, 전인류 공존공생권, 인류 통성과 시대양심, 세계평화, 인류행복, 인류역사, 세계기운 이런 말들로 빽빽하다.

한국기독교인의 세계의식
 한국교회는 그 태생기부터 세계성을 가지고 있었다. 1892년 '찬송가'에는 만왕, 만국, '끄릴난 어름산과 인도 산호섬과 아프릭 더운 내에 금모래 깔린 곳 강과 산과 넓은 들', 이런 글들이 쌓여 있었다. 1906년 존 무어 선교사는 한국이 구원의 횃불을 드는 날 세계문제가 해결되되 제대로 해결되고 만국을 구원할 수 있다고 예언하고 있었다. 1907년 독노회(獨老會)가 조직되었을 때에는 그 해가 정미조약으로 나라가 망하고 있었는데도 만국기를 게양하고 있었다. 세계를 생각하고 있었다.

3.1독립운동과 도덕적 개혁
 일제는 합병 하자마자 한국인의 정신과 신체를 체계적으로 해체할 악덕한 시책을 펴고 있었다. 한국 인종의 멸절정책이다. 그래서 주초(酒草)를 장려하여 주초세 수입이 전체 조세 수입의 48%까지 육박하던 때가 있었을 형편이었다, 길선주 목사는 주초 반대하는 설교를 하였다가 주초법에 걸려 징역을 산 적이 있다. 공창 유곽(遊廓)은 합병직후 부터 50만불의 국비로 건설하고 있었으며 동양의 예루살렘이라던 선천에도 유곽이 들어서고 있섰다.

아편은 총독부가 예산 투입하여 재배하고 국가기관 전매청에서 팔고 있었다. 행상인도 팔았다. 필자의 초등학교 담임 중 한국인 두 분이 다 아편 중독자였다. 3.1독립운동 이후 새로 부임한 사이또(齊藤實) 총독이 한국교회와 선교사들을 불러 독립운동 이후의 한국선정 방향을 물었을 때 가장 중요하게 개혁을 요구한 것이 도덕적 패악이었다.

역사의 미래에 대한 계시록
 조선총독부와 미국 NCC의 묘한 공통 인식이 하나 있었다. "지금 한국에 그 민족의 장래에 대하여 희망을 포기하고 있지 아니한 유일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기독교인들이다" 만주의 포조 신한촌의 '독립선언서' 에도 그런 희망이 비취고 있었다. "지금 혹 힘들어도 우리의 자손들은 독립을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
'3.1독립선언서'에 나타난 희망의 가락은 역사의 미래에 대한 눈부신 불길 그 봉화대다. "아 새 하늘과 새 땅이 눈앞에 펼쳐지는구나 새 문명의 서광을 인류의 역사 위에 던지기 시작하는 구나 새봄이 온 누리에 찾아 들어 만물의 소생을 재촉하는구나"

1920년 남궁억은 '삼천리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이란 찬송가를 부른다. 한데 그는 '기러기'란 노래를 짓는다. 짝 잃고 멀리 벽공(碧空)에 날아가는 기러기가 나라 잃은 우리 같았다. 한데 3절은 희망의 북소리 요란하다. "곡간 없이 나는 새도 기를 자 뉜가 하늘 위에 한분 계서 네길 인도하신다. 너 낙심치 말고 목적지 가라 엄동 후엔 난풍(暖風)이요 고생 후엔 낙이라!" 당시 새문안 교회의 홍난파와 김형준이 '봉선화'를 지어 온 겨레가 소리 높이 목쉬도록 불렀다. 가울 바람에 처량하게 시든 봉선화 같은 우리지만 그러나 3절에는 화산이 터지는 듯하다. "엄동한설 찬바람에 네 형체가 없어져도 평화로운 꿈을 꾸는 너의 혼은 예 있으니 화창스런 봄바람에 회생키를 바라노라!"

3.1독립운동에 혹독한 시련을 겪고 있었지만 삼천리강산 도처에 활화산처럼 미래 희망과 약속이 하늘가에 무지개치고 있었다. 교회가 민족 그 미래의 계시록이었다. 그런 것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이 교회의 갑작스런 발전과 부흥이었다. 기독교 학교 학생수는 전년 비 90%가 증원하고 있었으며 교회교인은 3배가 늘어난 곳이 있었다.

3.1운동 역사 보존의 역학
 출애굽기 10:2에는 역사를 보아야 우리가 여호와의 증거를 볼 수 있다는 글이 나온다. 모세 고별사에 '옛날을 기억하가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란 글이 새벽이슬 같이 맑게 빛나고 있다. 기록은 신앙이다.

일본 안의 언론도 통제를 받아 3.1독립운동에 관하여 3월 7일에 가서야 보도를 시작한다. 한국 안에는 일간지 자체가 없었고, 주간지는 선교사들 것까지도 일언반구 보도가 없었다. 박은식, 김병조, 신흥우, 정한경 등이 있었으나 좀 이후의 일이고 또 비분감개로 조리가 흩으려져 있다.

한데 가장 신뢰할 만한 대담한 보고가 문서화 한 곳이 있다. 1919년과 1920년 10월 소집된 장로교제 8회와 9회 총회록, 그리고 거기 부록으로 실린 노화상황보고서들이다. 더구나 1919.10.4 조선예수교장로회 제8회 총회록은 골리앗 앞에 나선 다윗 같았다. '장로교총회는 개회벽두에 당시 총회장이던 김선두 목사가 본년 3월 1일에 조선독립운동 사건으로 경성 서대문 감옥에 수감되어 본회로 보낸 편지를 서기가 낭독함에 회중이 슬픈 마음으로 받고 회장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한 일'을 인쇄한다. 이는 교회가 공식적으로 3.1독립운동 사건을 공문화한 문서로 기념되어야할 자료이다. 그러고 나서 각 노회 상황보고인데 예언자적 품위와 용기가 거기 불 타 빛나고 있다. 전국 12개 노회가 전부 '조선독립만세사건'에 대한 피해 상황 통계를 자세하게 보고하고 있다. 더구나 '독립'이란 말을 못 쓰게 되어 있었는데도 교회는 오히려 보란 듯 그 말을 반복 단연 쓰고 있었다.

당시 3.1운동에 대한 보도나 피해상황에 대해 이처럼 대대적으로 공개한 곳은 교회가 유일하였다. 정의 진리의 봉화대가 여기 있었다. 그런 것이 세계사의 실록이 된 것이다.

우리와 동조한 일제 인사들이 있었는가
 아합왕 때 예후가 멀리 이사벨을 보고 소리친다. '누가 내편에 서 있나 누가!'
우리는 일본교회는 그래도 우리를 동조할 줄 알았다. 하지만 우리와아 제일 가까운 것으로 알았던 우찌무라 간조도 3.1독립운동때 피해 살상 같은 것 날조요 과장이라고 춤 뱉았다. 서울의 일본인교회 장로 한 사람은 하세배 이와오 헌병대좌인데 그는 제암리교회 사건을 일으킨 아리따 도시오 헌병중위의 상관이었다. 서울의 일본이 교회당 앞뜰에는 3.1독립운동 당시 일본 헌병들이 한국인 시위자들을 10여명을 끌고 와서 십자가 십여 개를 세우고 거기 매달고 독을 뿌리고 몽둥이로 쳐 살상하고 있었다.

한데 기상천외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3.1독립운동 당시 그 일본에도 우리와 동행한 동조층이 있었다. 그것도 일본 최고층에 있는 사람들에게서이다. 도꾸도미 소호(德富蘇峰)가 그 사람인데 일본 최고의 국수주의자로 '일분국민사' 100권 총서를 저술한 황도파인물이다. 일본 군벌 총수 야마가따 아리도모와 절친한 인물로 조선총독에 버금가는 인물이었다. 그는 '서울 프레스' 총감독으로 있으면서 3.1운동 당시 1919 3월-11월 수십 논설을 통해 인도주의를 외치고 일경 만행을 매섭게 고발하고 있었다. 특히 그는 일본 안의 기독교회 어느 하나도 이웃나라 한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동료교인들에 대한 총독부의 살벌한 핍박과 잔학에 대하여 일언반구 없다 함이 신기할 뿐이라고 야유하고 있었다. 그는 일본 교토의 도시샤대학교 출신이데 그가 받은 기독교 교육이 그를 그렇게 세계시민으로 만든 것이 확실하다.

다른 한 사람은 당시 총독부 고위관리 나까라이 기요시(半井淸)이다. 그는 3.1독립운동을 곡해해서 공격한 자들을 참으로 난처한 <자>들이라고 비난하는 글을 낸다. 한국교회를 모르는 자들의 소행이라 치토한다. 일본 국내 '요미우리신문'이나 '아사히신문'에도 역시 같은 논조의 기사가 눈에 띄인다. 곧 3.1독립운동이 무지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의 집단행동이 아니고 지식계습이 중심이 되어 있다는 점, 총독정치가 정도를 벗어나고 있었다는 것, 총독부가 변하는 세계사조와 사상 추이의 대세에 눈이 어두워 있었다는 것, 총독정치의 강요는 천박했다는 것, 일제 군경의 소요진압 방법이 <벨기에 훈족들과 다름없는 만행을 저질렀다는 규탄, 이런 글들이었다. 일본 언론으로서는 짐작도 못할 대단한 논조 비판이었다.

당시 총독부 내사국장 우사미 가쯔오(宇佐美勝夫)는 한국교회를 계속 옹호하고 그 곤경을 동정하고 있었다. 우리가 세계에 희망을 두고 전진하여야할 까닭이 이런 데에 있는 것이다. 저 악한 세력 어딘가에 선의 가지(枝)가 뻗고 있고 거기서 자라고 있다는 확신 때문이다.

3.1독립운동에서의 한국교회 역할
 3.1독립운동은 한국교회와 떨어져 이해할 수 없는 교회 주도의 전 민족 궐기의 운동이었다. 전국적 조직이 있었기 때문인데 교회는 이런 사회적 역할에서 주도적 사명을 수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 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국제관계의 네트워크때문에 세계사의 흐름과 세계와의 결속이 가능하여 독립운동의 세계사적 동력 동원이 가능하였고 그런 의미를 선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정치나 사회에서의 도덕성은 아주 긴요한 중추적 가치이다. 한데 일제는 한국에서 주초나 유곽 아편을 국가가 운영 판매하고 있었다. 도덕적 범죄를 총독부가 나셔서 자행하는 무도패륜의 길을 짐짓 걸어갔다. 3.1독립운동은 교회가 이런 국가적 차원의 부패 배륜정책을 고발 개혁하는 운동이었다.

3.1독립운동으로 일제 잔학행위는 극에 이르렀고 한국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교에게는 더구나 그 참상이 심각하였다. 한데 그런 기록과 역사는 손 댄 곳이 교회밖에 없었다.

교회가 한 일은 3.1독립운동에서 거대한 민족의 계시록이었다. 압제와 시련 살상과 파괴가 쌓여갔지만 교회는 불붙는 눈길로 먼 미래에 눈부신 한국 그 영광을 노래하고 있었다. 불탄 만신창이의 강토였지만 금수강산으로 노래하고 있었다. <하늘 위에 한분 계셔 네 길 인도하신다 너 목적지 가라> 외치고 있었다.커다란 사건, 국가문제, 국제간의 문제에는 이쪽 저쪽이 나뉜다. 양분된다. 피아(彼我)가 줄 그어지고, 적과 우리가 구분되고 거기 싸움과 증오가 계속된다.

한데 3.1독립운동에서 우리를 옹호할 것 같았던 일본교회가 대개 우리를 적대시하고, 일본 국수주의자와 총독부 일부 고급관리 그리고 일본 일부 언론이 오히려 우리를 옹호 변호한다. 그리고 일제 군경을 비판하는, 그런 일이 벌어진다. 저 건너 쪽에도 누구는 선의 편에 손닿는 동지가 있다는 그런 구도이다. 3.1독립운동 때의 일제고위층이나 일부 언론의 3.1독립운동 옹호는 이런 변수의 성격을 가진다. 이런 현상은 우리 현장이 비록 최악의 경우라고 할지라도 희망과 미래를 약속하는 거대 징표로 빛나고 있다.

/자료제공 = 한국복음주의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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