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병금
▲한복협 부회장, 강남교회 전병금 목사 ©자료사진

2015년 1월에 발표된 한국갤럽조사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의 종교인구비율이 약 50%정도 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국민 두 사람 가운데 한 명은 어떤 종교든지 속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구의 절반가량이 불교, 개신교, 천주교를 비롯한 다양한 종교에 속해 있는데, 지금까지 종교 간에 평화를 누리고 지내온 것은 큰 축복입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종교 간의 분쟁이 내전으로까지 비화되어 사회 혼란의 원인이 되기도 하는데, 그에 비하면 우리나라에 있는 종교들은 큰 갈등을 빚지 않고 공존하고 있으니,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나라 종교의 발자취를 돌아보면, 민족적인 위기를 맞이했을 때, 협력했던 일이 더 많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일제 강점기에 있었던 3.1운동입니다. 이때 한국의 여러 종교 지도자들이 종교를 초월하여 독립만세 운동을 함께 도모한 것은 세계 종교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가 어려운 종교적 연합운동입니다.

오늘도 이렇게 우리나라의 각 종교의 지도자들이 함께 모여서, 우리 민족의 가장 큰 갈망인, 우리 민족의 화해와 통일에 대해서 의견을 나누고, 종교의 역할을 함께 모색해 본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의미있는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누가복음 10장 본문은,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인 율법교사와 예수님이 영생에 대해 논쟁한 이야기입니다.

먼저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질문합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25절)

그러자 예수께서는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26절)고 되물으셨습니다.

명색이 율법교사인 그는 자신 있게 말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27절)

그때 예수께서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28절)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논쟁을 시작한 율법교사는 뜻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자, 또 다른 주제를 가지고 논쟁을 시작합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29절)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를 통해,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종교 지도자들을 통렬히 비판하시면서, 참된 이웃의 의미에 대해서 설명하였습니다.

30절부터 시작되는 비유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그곳은 아주 가파르고 굴곡이 심하여 양편으로 골짜기와 암석들이 많아, 상인들을 노린 강도들이 들끓던 지역이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인들은 "붉은 피가 흐르는 길"이라고 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무시무시한 곳에서 강도를 만난 그 사람은 모든 재물을 빼앗기고, 강도들의 무자비한 폭력에 옷도 다 찢어지고, 거의 숨이 끊어질 지경이 되어 길가에 버려졌습니다.

그런데 마침 제사장 한 사람이 그곳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중재하는 역할을 하는 종교 지도자로서, 주로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주관했습니다. 그런데 그 제사장은 길가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도 도와주지 않고 제 갈 길을 가버렸습니다. 이스라엘의 율법에 따르면, 시체와 같이 부정한 것을 만진 사람은 7일 동안 부정하다고 했기 때문에 (민 19:11), 아마도 제사장으로서 부정한 것을 피하기 위해 그랬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제사장의 직무는 잘 감당했는지는 몰라도, 이웃 사랑의 계명은 외면하고 말았습니다.

제사장이 지나간 지 얼마 후에, 레위인 한 사람이 지나갔습니다. 레위인도 성전에서 일하는 제사장을 돕는 성직자였습니다. 이들은 언제나 하나님께 대한 경건을 강조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레위인도 앞선 제사장처럼 강도를 만나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사람을 외면하고 말았습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이나 겉으로는 열심 있는 종교인인척 했지만, 실제로는 이웃의 고통에 눈감아 버리는 위선자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에 지나가던 사마리아인 한 사람이 그 강도 만난 사람을 외면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를 상처를 싸매어 주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주막 주인에게 치료를 부탁하면서 비용이 모자라면 자신이 갚겠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왜 문제가 되냐면, 그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혼혈 민족이라고 하면서 천시했는데, 평소 존경받던 제사장과 레위인은 고난당하는 이웃을 외면한 반면, 평소에 천시 받던 사마리아인이 동족도 아닌 유대인에게 선을 행했다고 하는 이야기를 통해 당시 종교 지도자들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래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들은 같이 유대민족이었습니다. 그런데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당하면서(B.C.721년), 앗수르의 혼혈정책으로 인해 강제적으로 혼혈민족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후 바벨론에게 멸망당한 유대인들은 포로로 끌려갈지언정 결코 이방인들과 혼혈이 되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나름대로 순수한 혈통을 지켰다고 자부하던 유대인들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할 때, 이를 돕겠다고 나선 사마리아인들을 배척하였습니다. 이에 분개한 사마리아 인들은 사마리아에 있는 그리심산에 별도의 성전을 건축하고 그곳에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예루살렘과 그리심산을 중심으로 종교적으로 분열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서로 원수처럼 반목하며 지내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민족적 차이, 종교와 이념, 사상의 차이로 분열과 갈등을 겪는 일들이 많습니다. 한국인의 뿌리 깊은 고질병인 연고주의가 개입되어 학연, 지연, 또는 종교에 의해서 이웃의 범주를 한정하곤 합니다. 그런데 그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만난 유대인을 돕는데 있어서, 민족이나 종교, 이념이나 사상을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저 죽어가는 사람을 돌봐 주었을 뿐입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의 메시지는 우리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은 누구나 우리의 이웃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고난을 당하는 이웃을 도와주는 일은 이론이나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모인 여러분들은 각 종교의 성직자들입니다. 또한 자기 종교를 수호하고 발전시켜야 하는 지도자들입니다. 종교마다 교리가 다르고, 세계관이 다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날 '강도만난 사람들', 즉, 힘 있는 사람들로부터 소외되고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들의 이웃이 되어 주어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제사장이나 레위인처럼 오늘날 강도만난 사람들의 도움 요청을 외면해서는 안됩니다. 세월호 사건과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정부와 사회의 무관심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오늘날 강도만난 사람들의 고통과 억울함은 도를 더해가고 있는데, 그들이 내민 손을 잡아 주는 '사마리아인'은 드문 것이 현실입니다. 때로는 저항으로, 때로는 희생과 헌신으로 이 땅에서 고통당하는 자들의 손을 잡아 주고, 그들의 요청에 응답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본분일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이 모든 고통의 근원이 되는 자본주의의 폐해와 민족분열 정책을 치유하는 일에도 함께 나서서 이 나라에 정의와 평화, 통일의 시대를 이끌어 오는 견인차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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