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웅 교수는 북아메리카 땅에 정착한 청교도들은 '생존 그 자체가 가장 심각한 도전'인 상황에서도 "영국을 떠나온 본래의 이유를 생각하며 공동체를 유지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오상아 기자

[기독일보 오상아 기자] '기독교학교의 미래전망'을 주제로 지난 29일 오후 서강대학교에서 진행된 제9회 기독교학교교육연구소 학술대회에서 '미국 기독교학교의 전개 과정, 최근 쟁점, 그리고 시사점'을 주제로 발제한 서강대학교 김재웅 교수가 소개한 '식민지 시기의 학교와 기독교' 관련 내용이 눈길을 끌었다.

김 교수는 먼저 청교도들이 북아메리카 대륙에 발을 내딛은  시기부터 설명했다. 그는 강준만 교수의 관련 저서 내용을 인용해 "1620년 9월 16일 102명의 청교도가 탄 메이플라워(Mayflower)호는 영국의 플리머스(Plymouth) 항구를 떠나 67일간의 항해 끝에 북아메리카 땅에 정착했지만 그 이듬해에 절반 정도가 질병, 기아 등으로 사망했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습격, 추위, 굶주림, 질병 등의 문제와 싸워야 했던 그들은 사실 생존 그 자체가 가장 심각한 도전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그들은 "영국을 떠나온 본래의 이유를 생각하며 공동체를 유지하고자 했다"며 "따라서 성경읽기를 통한 신앙의 전수가 가정적 교회적 사회적으로 가장 중요한 일이었으며, 이 시기에는 지역사회와 교회가 중심이 되어 해당 지역의 아이들 교육을 담당했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식민지 시기 학교들의 특징을 요약하며 "첫째, 식민지 시기 북아메리카에는 종교의 자유를 찾아 유럽의 모국을 떠난 다양한 종파를 믿는 사람들이 여러 지역에 흩어져 정착하였고 이들은 각자 자신의 종파의 교리를 중심으로 자녀들에게 교육을 시켰다"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영국 국교회 성공회에서 이탈한 청교도들은 뉴잉글랜드 지역에, 네덜란드 칼뱅파는 뉴 암스테르담(오늘날 뉴욕)에, 프랑스 위그노파는 캐롤라이나 해안 지역에, 스코틀랜드 장로교도들은 뉴저지에, 영국 퀘이커교도들은 필라델피아에, 스웨덴 루터파는 딜라웨어에, 영국 성공회 지지파는 버지니아와 남부 식민지에, 가톨릭은 주로 메릴랜드에 정착했다"고 전했다.

김 교수는 각 지역마다 다양한 형태의 교육제도가 발달했다며 "뉴저지와 뉴욕의 경우 교구가 직접 부유층을 위한 사립학교나 가난한 가정의 아동들과 고아를 위한 자선학교(charity school)를 운영하기도 했다"고 했다.

김재웅 교수는 둘째로 '오늘날의 공교육 제도의 정신'이 이미 스며들어 있다고 말했다. 그는 뉴잉글랜드의 청교도 정착촌의 예를 들며 "이들이 가정의 종교적 가치를 자녀들에게 물려주기 위해 얼마나 고심했는지, 부모에게 맡겨진 종교교육이 가정의 형편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는 점을 고려해 정착촌의 청교도 지도자들은 1642년 법률에서 정부 관료에게 학부모의 자녀교육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있는지 김독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다. 또 법원에게는 정부가 이 일을 잘하고 있는지 감독하도록 했다"고 소개했다.

김 교수는 "그러나 가정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자녀교육은 여전히 만족스럽지 못해 1647년 법률에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의무교육의 구현 방법을 명시했다"며 이는 50가구 이상의 마을에는 읽기와 쓰기 유급 교사 임명하기, 100가구 이상의 자치구에서는 대학준비 문법학교를 운영하기였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를 지키지 않으면 벌금을 물리도록 했다"며 "아동이 일정 기간 동아 의무적으로 교육을 받아야 하고 정부는 이들의 교육을 위해 공적 재정을 투입해 학교를 운영해야 한다"고 했다.

김재웅 교수는 셋째로는 북부의 뉴잉글랜드 지역 등과는 사뭇 다른 양상을 띠었던 '버지니아완 남부지역의 교육'을 소개했다. 그는 "영국 국교인 성공회 지지파들이 정착한 버지니아와 남부 지역에서는 백인 하인들과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을 고용해 운영하는 대규모 농장이 성행하였는데 이 지역에서는 학교 설립의 필요성을 느끼지도 못했고 사실상 쉽지도 않았다"고 했다.

그는 "아메리카 대륙 이주의 동기가 종교적 이유에 있지 않았던 성공회파는 북부의 청교도와는 달리 교육을 위한 종교적 동기가 강하지 않아 주민의 교육에 앞장서지 않았다"며 "부유층 자녀들은 가정에서 튜터를 고용하거나 학비가 비싼 사립학교에서 고급 교양 교육을 받았고, 일정 기간 공부 후에는 영국의 옥스포드나 캠브리지로 유학을 갔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러나 드넓은 농경지에 흩어져 살았던 중산층 이하 가정은 자녀교육을 제대로 시킬 수가 없었다"며 "이러한 관행은 교육은 기본적으로 개인과 가정의 일이라는 그들의 모국인 영국전통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이어 "대신 국가는 가난한 하류 빈민층을 위한 직업훈련을 제공했고, 교회도 가난한 아이들과 고아를 위한 자선학교를 운영했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또한 "아직 정교가 분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당시 지배계층이었던 백인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기독교 정신을 아프리카 미국인과 미국 원주민의 교육에도 적용하기를 원했다"고 덧붙였다.

이외 이날은 '인구통계 전망에 따른 기독교학교의 미래 분석'(박상진 교수, 장로회신학대학교), '공교육의 변화와 기독교학교의 대응'(김창환 선임연구위원, 한국교육개발원), '미래 사회가 요구하는 핵심 역량과 기독교학교의 과제'(강영택 교수, 우석대학교)를 주제로 발제가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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