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렵고 진지하기만 한 '파우스트'가 아니다. 메시지를 관객들에게 감성적으로 또 쉽게 전달하도록 하기 위해 다른 작품의 대사나 이미지를 과감하게 차용하기까지 한다. '귀여운' 수준의 치기(稚氣)가 엿보인다고나 할까. 역겨움을 유발하거나, 과도한 성적 이미지를 드러내는 부분도 몇 군데 있다.

파우스트 역의 정보석 배우가 귀족적인 면모로 삶에 대한 깊이 있는 독백을 자주 하면서 무대가 사뭇 고급스러운 향내를 낼 것으로 기대하고 극장을 찾은 관객들은 다소 이질감을 느낄 수 있다. 역으로 그렇기 때문에 작품에는 신선함이 있다.

서울 명동예술극장 무대 위에 오른 '우어파우스트(Urfaust)'는 '초고(草稿) 파우스트' 또는 '원형 파우스트'라고 번역되는 작품으로 말 그대로 독일의 대문호 괴테가 쓴 '파우스트'의 최초 형태다.

괴테가 57세 때인 1806년에 '파우스트 1부'를 완성했고, 20대 중반인 1773~1775년에 '우어파우스트'가 쓰여졌으니까 약 30년의 시차가 있는 셈이다. 그만큼 작품의 내용에는 차이가 존재하고, 그 위에 연출자가 동시대적인 시각으로 작품을 풀어내다 보니 기존의 '파우스트'에 익숙한 관객들에게는 새로운 느낌을 줄 수 밖에 없다.

이 연극에서 파우스트는 무대에 나타나는 빈도, 시간 등을 감안할 때 다른 역할과 크게 차별화된 주인공이 아니다. 등장인물 여섯명의 비중에 그리 큰 차이가 없다. 이 얘기는 곧 상대적으로 마르거리트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친숙해져 있는 극중 그레트헨이나 그의 오빠 발렌틴의 역할이 '파우스트'에 비해 훨씬 더 부각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연출을 맡은 독일의 차세대 연출가 다비드 뵈시가 이 작품의 이름을 '그레트헨'이라고 붙였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농담처럼 했을 정도로 그레트헨의 비중이 커졌다. 악마 메피스토펠레(이하 메피스토)의 역할은 '파우스트'에서도 매우 크지만 '우어파우스트'에서는 파우스트에 비해 장면이 상대적으로 더 많다는 느낌이 든다.  

배역의 비중 변화에 따라 자연스럽게 이야기의 흐름이나 내용도 '파우스트'에 비해 다른 것이 많다.

두드러진 것 중의 하나는 그레트헨에 대한 오빠 발렌틴의 근친상간적 사랑의 느낌이 대사와 연기를 통해 짙게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을 눈썰미 있는 관객이 알아차리도록 하기 위해 연출자는 엉뚱하게도 뷔히너의 '보이체크'에서 대사를 차용한다. 아내 마리가 고적대장으로부터 받은 귀걸이를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보이체크가 귀걸이의 출처를 물으며 아내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장면이다. 그 대사가 발렌틴-그레트헨의 대사로 복사된다. 또 다른 하나는 순박한 시골처녀 그레트헨이 파우스트의 아기를 가진 것이 아니라 악마 메피스토가 그녀를 범해 임신을 하게 됐다는 느낌이 있다는 점이다.

극중 메피스토의 악마성은 그같은 성폭력적 이미지로 자주 드러난다. 그는 자신을 파우스트로 착각하고 제자가 되려하는 학생에게 성도착적 행위를 서슴지 않고 한다. 성적 공격 외에도 학생의 입을 드릴로 찢어 피투성이로 만들어 개 처럼 끌고 다닌다. 메스꺼움을 느낄 수 있는 장면 중의 하나다.

흥미로운 점은 '보이체크'의 일부 장면을 차용한 것 외에도 몇 가지 연상작용을 일으키는 장면이 있다는 점이다. 그레트헨이 메피스토의 성폭행, 질투심으로 들끓는 오빠 발렌틴으로부터 발길로 차이는 등의 폭행을 당한 후 실성한 상태에서 파우스트를 만나는 장면은 '햄릿'의 미친 오필리어 장면을 떠올린다. 또 사랑에 빠진 그레트헨과 파우스트가 헤어지는 장면에서 몇 번이고 발길을 돌려 얼싸안고 키스하는 장면은 '로미오와 줄리엣'의 발코니 키스 장면들 연상케한다. 이런 장면들은 연출자가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것 같은 느낌이다.

뵈시 연출은 고전을 지금의 관객에게 현대적인 이미지와 함께 감성적으로 전달하는 것을 중요시하는 연출가다. 그만큼 이번에도 많은 사람들이 내용을 익히 알고 있는 '파우스트'를 이 시대의 관객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연출한 흔적이 엿보인다. 그는 때로는 원작의 내용과 대사를 과감하게 바꾸기도 한다.

이번 작품 중에는 영국의 고전 록그룹 롤링스톤스의 작품 '악마에 대한 연민(Sympathy for the devil)'의 가사내용 중 일부를 메피스토의 대사로 썼다. 신이 더 이상 모든 것을 좌지우지할 수 없는 존재라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신을 휠체어에 태워 등장시킨 것도 눈에 띄었다. 또 그레트헨의 키스신에서 키스 도중 발에 뭔가가 붙어 떼어내려는 동작을 하는 것 등이 코믹하면서도 실생활에서의 움직임을 그대로 무대로 옮겨왔다는 점에서 신선함을 안겨주었다.

이남희 배우의 메피스토 역 연기는 단연 돋보였다. 메피스토의 악마성과 익살기를 동시에 표현해내는데 그만한 배우가 없을 듯했다. 정보석 배우 역시 두 손으로 힘들게 축대에 매달려 대사를 치는 등 좋은 연기를 펼쳤다. 다만, 그가 완전한 주인공 역할을 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훌륭한 연기를 충분히 보여줄 수 있는 장면이 상대적으로 적었다는 점이 팬들에게는 아쉬움으로 남을 것 같다.

무대는 거의 비어 있는 상태. 무대 왼쪽에 그레트헨의 집 등의 역할을 하는 세면대와 빨래통 등 몇 가지 조그만 장치와 소품이 놓여 있을 뿐이다. 작품 속에 배어있는 고독과 슬픔의 감정을 리얼하게 드러내도록 하기 위해 텅 빈 무대와 영상을 쓴 것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 연극 '우어파우스트' = 명동예술극장이 개관 이후 처음으로 해외연출가를 초청해 제작한 연극이다. 연출을 맡은 다비드 뵈시는 올해 33세의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독일을 대표하는 50명의 연출가 중 한 사람으로 선정돼 있을 정도로 연출능력을 인정받고 있다. 명동예술극장은 원래 '파우스트'를 제작하고자 했으나 뵈시가 '우어파우스트'라면 할 수 있다고 역제의해 와 이 작품을 무대에 올리게 됐다.

그외 만든 사람들은 ▲번역 및 드라마투르기 김미혜 ▲무대ㆍ의상ㆍ영상 디자인 팔코 헤롤드(Falko Herold) ▲조명디자인 고희선 ▲분장디자인 강대영 ▲음향디자인 최환석 ▲조연출 오동식ㆍ이단비ㆍ이재민.

출연진은 정보석(파우스트)ㆍ이남희(메피스토)ㆍ정규수(신)ㆍ장지아와 이지영(그레트헨 더블캐스팅)ㆍ김준호(학생)ㆍ윤대열(발렌틴).

공연은 명동예술극장에서 9월3일부터 10월3일까지. 공연문의 및 예매는 명동예술극장 ☎1644-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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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어파우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