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 문제가 내년 미국의 대선 향방에 결정적인 변수가 될 수 있을 것이란 전망이 나왔다. 최근 미국의 일부 주(州) 의회 의원선거와 주민투표 등에서 민주당이 일제히 승리를 거둔 결정적인 이유가 ‘낙태권’ 이슈에 있었다는 분석이다.

최근 치러진 버지니아주 상·하원 선거에서 민주당이 양원 모두 승리했다. 펜실베이니아주에서도 대법관 한 자리를 채우는 선거에서 열렬한 ‘낙태권 수호자’로 알려진 민주당 소속의 댄 맥커패리가 당선됐다. 전날 오하이오주에선 낙태 권리를 주 헌법에 명기하는 개헌안이 주민투표를 통과했다.

이들 선거의 공통점은 낙태권이 핵심 이슈로 등장했다는 점이다. 이번 선거에서 민주당이 낙태권을 최대 쟁점으로 삼아 공화당의 낙태권 폐지 정책을 집중적으로 공략한 게 먹혀들었다고 분석이 나온다.

이런 선거전략이 공화당의 텃밭으로 여겨온 지역에서까지 통하자 민주당은 낙태권 문제를 내년 대선의 최대 이슈로 끌고 갈 방침이다. 그동안 각종 여론조사에서 공화당의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밀리고 있는 바이든 대통령이 낙태권 이슈로 역전할 수 있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미국 일부 주에서 치러진 이번 선거는 모두 다른 성격을 띤다. 그런데도 선거 결과를 분석해보면 그 중심에 낙태 문제가 포함됐다는 특징이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 등 주요 언론들이 결국 내선 대선에서 유권자들이 낙태권 이슈를 위해 투표장을 향할 것으로 예측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실시한 각종 여론조사에서 현 바이든 대통령은 경쟁자인 트럼프 전 대통령에 뒤지는 모양새다. 나이 문제와 지속된 인플레이션에 따른 경기둔화, 세계정세 불안이 지지율 하락의 요인이다. 특히 네바다·조지아 등 핵심 경합 주 5곳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에 4∼11%포인트씩 뒤짐으로써 내년 대선 가도에 적신호가 켜졌다.

이런 현실에서 민주당이 낙태권 이슈 하나로 전국적인 주요 선거에서 승리를 거뒀다는 건 예사로 여길 문제가 아니다. 주목할 점은 이번 선거에서 버지니아·펜실베이니아 같은 경합 주뿐만 아니라 공화당 텃밭으로 분류된 켄터키·오하이오와 같은 소위 ‘레드 스테이트’ 지역에서까지 승리를 거뒀다는 점이다. 낙태권 이슈가 미국 전역에서 얼마나 파괴력이 있는지를 확인시킨 결과로 평가될 정도다.

특히 지난 2020년 대선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이 8%포인트 차이로 여유 있게 이긴 오하이오주에서 57%가 낙태권 보장 개헌안을 지지했다는 건 다소 충격적인 결과다. 지난 대선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26%포인트 압승을 안긴 켄터키주에서 낙태권 보장을 정책으로 내세운 주지사가 승리한 것도 최근에 달라진 분위기를 실감케 한다.

낙태는 1970년대 초까지는 미국 대부분의 주에서 불법으로 간주됐다. 그러다 1973년, 대법원이 임신 23~24주가 되기 전에 임신한 여성이 어떤 이유로든 임신 상태에서 벗어나는 결정을 스스로 내릴 권리가 있다고 판결함으로 사실상 낙태를 합법화했다. 이 판결은 소송을 제기한 여성의 가명과 검사의 이름 그대로를 따와 ‘로 대 웨이드’ 판례로 불려왔다.

그러나 지난해 6월 미국 연방대법원이 50년간 이어져 온 낙태 합법화 판례를 파기했다. 50년 전에 연방대법원이 여성이 자기 몸에 대한 결정권을 지닌다고 판결한 것을 스스로 번복함으로써 미국에서 낙태는 더이상 헌법으로 보장받는 기본권이 아닌 게 됐다.

낙태 합법화 파기 후 미국 내 50개 중 미주리주가 처음으로 건강상 비상 상황을 제외한 임신중절을 금지했다. 미시시피, 텍사스 등 보수성이 짙은 주에서도 같은 결정이 내려졌다. 그러나 낙태권 옹호론자들의 거듭된 시위와 집권당인 민주당이 낙태권 보장을 당론으로 내세우면서 메릴랜드, 워싱턴 등 10여 개 주가 내년 선거 때 낙태권 보호를 위한 주 헌법 개정안을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

지금의 흐름으로 보아 낙태권 문제는 내년 대선에 최대 이슈 중 하나가 될 가능성이 크다. 다만 전문가들은 낙태권 이슈가 정치적 쟁점 중 하나인 건 맞지만 그렇다고 바이든 현 대통령의 낮은 인기를 덮을 만큼 대선에서 어떤 위력을 발휘할지는 예단하기 어렵다는데 무게를 두고 있다.

미국 내 낙태권을 둘러싼 쟁점이 최근 정치적 이슈로 급부상하면서 미국 사회의 갈등이 더욱 심화되는 분위기다. 이런 시점에서 낙태권 찬반 문제를 둘러싸고 둘로 갈라진 미국 사회를 정치인들이 정치적 이슈화해 이를 부추기고 있다는 게 냉정한 판단이다.

미국은 자유와 인권을 생명으로 여기는 나라다. 그런 나라가 연방대법원 판결 이후 1년여 만에 태아의 생명을 해할 권리를 개인에게 보장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는 점은 매우 우려스럽다. 내년 대선 과정에서 이 이슈가 선거판을 뒤흔들 파괴력을 발휘할지 알 수 없으나 이미 여러 주에서 치러진 선거 또는 주민투표 결과를 보면 우려가 현실이 될 수도 있다.

미국이 어떤 선택을 할지와 상관없이 낙태 문제는 인간의 생명을 인간이 자유롭게 해할 수 있는가 하는 근본 물음을 우리 인간에게 던진다. 미국 정치권은 지금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정치적인 판단으로 내리려 하고 있다. 이 자체가 천부인권에 대한 도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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