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병채 총장
서병채 총장
이것은 좀 예민한 이슈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접근으로 생각해보겠다.

우리는 동기부여와 조종하는 것의 차이에 대해 조심해야 한다. 둘 다 사람을 움직이게 하지만 장기적인 사역에는 조종은 좋지 않다. 우리는 때때로 그것을 사용할 수도 있지만 그럴 때는 매우 조심해야 한다. 너무 남발하는 경우가 있기도 한데, 상대방으로부터 오해를 불러일으키기가 쉽다. 가능한 우리는 그런 접근을 피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우리는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다양한 방법에 대해 더 배울 필요가 있기도 하다. 왜냐하면 모든 사역은 동기부여에서 시작하고, 또 계속적인 동기부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내가 ‘좋은 일에 기여하고 있다’는 것은 아주 필요한 느낌이지만, 내가 상대방의 말이나 강요에 의해 '사용되고 있다(being used)'는 느낌을 받게 되면 뭔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현대인들은 이런 면에서 아주 예민하고 옛날보다도 더 신속하게 느껴진다. 특히 첫 대면에서 동기부여인지 조종하는 지를 알고 싶어 한다.

가끔 우리는 사람들을 움직여야 할 때가 있다. 그럴 때 동기부여보다는 조종하는 듯한 느낌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접촉할까 하는 유혹도 생기게 된다. 말을 물가에까지 데리고 갈 수는 있지만 물을 먹고 안 먹고는 스스로의 결정이다. 싫은 물을 억지로 먹게 하는 것은 ‘조종’(manipulation)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런 것을 너무 종종 사용하는 경우는 계속 교제하기가 불편해진다. 그러면서 계속적으로 나를 종종하는 듯하면 상처를 받으면서 조만간에 그만두어야 갰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결국 나 자신이 조심해야 하고, 또한 나를 대하는 사람들에게도 유의해야 한다. 좋은 일을 하면서 이런 불필요한 갈등에 시간과 에너지를 사용해야 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며 낭비인 것 같다.

동기부여와 조종의 경계는 무엇일까? 어떻게 구분하는가? 동기부여는 순수한 차원의 접근인 반면에, 조종은 인위적으로 사람을 움직이려는 심리적이고 기술적인 측면이라고 볼 수 있겠다. 동기부여는 상대방과 주어진 목표를 위해 하는 것이고, 조종은 나 개인의 사적인 유익을 위해 상대방을 이용하는 것이다. 동기부여에는 돌봄과 배려 등등이 포함되어 있다. 어쩌면 이타주의(other-centered)가 기본적으로 깔려있기도 하다. 상대방의 잠재력을 극대화 시키는 결과가 오게 된다.

팀으로 사역할 때 또는 두 사람이 사역하게 될 때에, 필요 요소는 두 가지로 알려져 있다. 하나는 개개인의 발전이 있어야 하고, 다른 하나는 모임의 목표달성이어야 한다. 첫 번째에는 돌봄과 격려가 있어야 할 것이고, 두 번째에는 동기부여가 있어야 할 것이다. 거기에 조종이 들어갈 필요는 없다. 나의 경우 멜빈 목사님과 30여 년 교제하면서 그분이 나를 조종한 경우는 없다. 지금 생각해보면 ‘배려와 격려’가 주로 있었다. 결국 동기부여의 다양한 측면이 있었다고 기억된다. 그런데도 나는 성장했고 주어진 목표를 달성했다.

스탠포드대학의 짐 콜린즈 교수도 그룹의 목표달성을 위해서는 준비된 사람들을 버스에 태워서 가야 한다고 한다. 그 말 속에는 조종하라는 의미가 담겨있지는 않다. 결국은 격려, 배려하면서 함께 가야 한다는 의미이겠다. 준비된 사람들이란 자기훈련, 스스로의 훈련이 충분히 된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본다. 요즘같이 모든 사람들이 성숙한 시대에는 방향 제시와 동기부여만이 우리 지도자들의 할 일이다.

모든 사역은 동기부여로 시작되어야 하고, 동기부여로 진행되어야 하고, 동기부여로 완료되어야 한다고 본다. 물론 진행과정에서 어려움들은 생기지만, 그렇다고 조종이 그 속에 스며들게 되면 지금까지 수고하고 애쓰고 노력한 것이 헛것이라는 후회가 될 것이다. 다 이루었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끝마쳐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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