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주 박형규 목사 3주기 기념 학술심포지엄
©기독일보 노형구 기자

[기독일보 노형구 기자] 수주(水洲) 박형규 목사 3주기 기념 학술심포지엄이 9일 오후 4시 한국기독교회관 2층 조에홀에서 열렸다. 박형규 목사는 우리나라의 대표적 민중 신학자 중 한사람으로 유신 군부독재에 저항했던 재야인사다.

우선 박형규 목사와 함께 수감생활을 했던 서중석 성균관대 사학과 명예교수가 발제했다. 그는 “비기독교인”이라 첫말을 떼면서, “그러나 박형규 목사는 한국의 본회퍼로 불릴 정도로, 박정희 유신 정권에 대해 저항했던 민중 신학자”라고 평가했다.

이 대목에서 그는 독일 히틀러와 박정희의 유신 쿠데타를 비교하며, 논지를 전개했다. 그는 “히틀러의 일인독재 길을 열어주었던 나치의 ‘전권 부여법’과 박정희 유신체제와 무엇이 다른가”라고 되물으며 “히틀러는 그나마 합법적 틀 안에서 권력을 얻었지만,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쿠데타와 유신헌법은 전혀 그러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특히 그는 “박정희 대통령은 무법·반 헌법 조치로 민주 공화국의 기본원리에 반하는 권력 변작(變作)을 일으켰다”며 “유신헌법을 만들고, 유신체제를 이뤄냈다”고 역설했다.

그러면서 그는 “나치는 1932년 7월 선거에서 제1당이 됐으며, 다음해 1월에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지명으로 합법적 수상이 됐다”고 전했다. 또 그는 “1933년 3월 히틀러는 전권을 휘두르기 위해, 4년간 의회나 대통령을 거치지 않고 단독 통치, 그리고 4년 후 행정부에 법률 제정권을 위임한 ‘수권법’을 제정했다”고 밝혔다.

수주 박형규 목사 3주기 기념 학술심포지엄
왼쪽은 권진관 성공회대 은퇴교수, 오른쪽은 서중석 성균관대 사학과 명예교수 ©기독일보 노형구 기자

뿐만 아니라 그는 “히틀러는 합법적인 과정을 거쳐 수상이 됐고, 수권법도 외형적으로 의회의 절차를 밟았다”고 꼬집었다. 결국 히틀러가 합법적으로 통치권을 얻었던 요인은 바로 '히틀러에 동조했던 독일 시민들'에 있던 셈이다.

그러나 그는 “박정희 유신쿠데타와 헌법은 그런 합법적 과정조차도 없다”고 밝혔다. 서 교수는 특히나 1972년 10·17 쿠데타를 두고 "계엄의 요건을 전혀 갖추지 못했음에도, 계엄을 선포해 군을 동원했다"고 평가했다.

하여 그는 “박정희의 10·17 쿠데타는 민주공화국의 기본원리에 반하면서, 군을 동원한 국가변란행위”라며 “비상 국무회의도 헌법을 유린한 불법기구”라고 지적했다. 이를 두고 그는 “박정희 대통령이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등 몇 명과 함께, 비밀히 헌법안을 통과시킨 허수아비 기구”라고 비판했다. 아울러 그는 “긴급조치 선포 또한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임의로 선포한 것”이라 비판했다.

여기서 서 교수는 박형규 목사가 평가한 유신체제에 대한 발언을 인용했다.

“유신체제는 과연 뿌리박았을까. 내 생각에는 아무도 자신있게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유신헌법은 뿌리가 있는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 긴급조치라는 막대기를 받쳐야만 하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서 교수는 “박형규 목사는 그와 뜻을 같이한 목회자와 함께 최초로, 유신체제를 반대하는 활동을 남산야외음악당에서 준비했다”고 전했다. 이른바 1973년 4월 ‘남산부활절연합예배’로서,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쿠데타와 유신헌법 공포에 반발한 사건이다. 서 교수는 이어 “부활절 연합예배에서의 반유신 투쟁은 민주주의를 지향했던, 한국 현대사에서 지울 수 없는 커다란 역사적 의의”라고 평가했다.

나아가 그는 “이를 디딤돌 삼아 민주화를 바랐던 시민·학생들은 유신체제에 맞서 투쟁할 용기를 얻었다”며 “이후 1973년 5월 제 2의 바르멘 선언으로 불리는 ‘한국 그리스도인 신앙선언’이 선포됐다”고 강조했다. 바르멘 선언은 나치 시대 신학자들이 모여, 정권에 투쟁하겠다는 공동 선언문이다. 대표적으로 신학자 칼 바르트가 참여했다.

수주 박형규 목사 3주기 기념 학술심포지엄
한국민중신학회장 최형묵 박사 ©기독일보 노형구 기자

뒤이어 한국민중신학회장이자 NCCK 정의평화위원장 최형묵 박사가 발제했다. 그는 “박형규 목사의 삶과 신학은 길 위에 있다”며 “1973년 남산 부활절 사건으로 처음 투옥된 이래,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투옥되기 까지 무려 6번”이라고 전했다.

이어 그는 “단순히 박형규 목사의 삶을 하나님의 섭리로 충분히 해명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즉 그는 “자기 삶의 자리에서 역할에 대한 뼈저린 자각 없이는 불가능했다”고 밝히며, ‘박형규 목사의 소명의식’을 역설했다.

특히 그는 “박형규 목사의 기독교 신앙 입문은 일회적이지 않고, 계속적인 과정”이라며, “박 목사는 언제나 두 극단 사이에서 고민하며 살아왔다”고 진술했다. 아래는 박 목사의 회고록 ‘나의 믿음은 길 위에 있다’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가정에서는 유교적·동양적 전통을 소중히 여기는 아버지와 모든 토속적인 것을 우상숭배라 거부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교회에서는 율법주의 내지 근본주의와 자유주의 사이에서, 사회에서는 좌익과 우익이 싸우는 부대낌 속에서 살아왔다”

박형규 목사에게 큰 영향을 끼친 신학자는 누구일까? 최형묵 박사는 칼 바르트와 본회퍼를 들었다. 그는 “교회로 하여금 교회 되게 하라”는 칼 바르트 말을 빌려, “박형규 목사를 그리스도인으로 이끈 인생 모토”라고 했다.

덧붙여 그는 “박형규 목사는 ‘하나님의 선교’를 적극 차용해, 빈민선교에 앞장섰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그는 박 목사의 말을 빌려 “선교란 하나님의 선물을 세상에 나누어 주는 일이고, 전도는 교회 안에 끌어 들여서 내 사람을 만든다는 의미”라고 전하며 “박 목사의 빈민선교는 결국 하나님의 선교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었다”고 강조했다.

뿐만 아니라 최형묵 박사는 박 목사는 본회퍼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음도 재차 말했다. 그는 본회퍼의 말을 빌려 “역사 속에 오신 하나님을 증거 하는 교회는 국가의 행동이 법과 질서 안에서 국가의 책임을 다하고 있는지 물어봐야한다”고 밝히며, “박형규 목사의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은 결국 본회퍼로부터 왔음”을 역설했다.

끝으로 최 박사는 “박 목사는 ‘인간이 자기를 신격화하려는 유혹에 빠지는 건 교만이며, 자기를 인간이하로 만드는 것은 비굴’이라고 했다”면서 “우상숭배는 인간의 가장 비굴한 모습”이라고 지적했다. 하여 그는 “우상 앞에 굴복하는 인간은 자기 인간성을 포기하고, 남의 인격과 존엄도 무시 한다”면서 “박 목사는 인간을 지배하는 기만과 폭력에 대해서, 우상의 권력과 싸울 것을 강조했다”고 밝혔다.

수주 박형규 목사 3주기 기념 학술심포지엄
왼쪽은 한국민중신학회장 최형묵 박사, 오른쪽은 서광선 이화여대 명예교수 ©기독일보 노형구 기자

논찬시간이 이어졌다. 이화여대 서광선 명예교수는 “박형규 목사님과 1962년 유니온 신학교 시절부터, 매주일 마다 같이 피맥(이태리 피자+맥주)을 했다”고 술회했다. 그는 “박형규 목사는 점점 한국의 본회퍼가 되고 있었다”면서 “본회퍼가 주장했던 세속적 성자를 몸으로 체득했던 셈”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그는 “박 목사에게 있어 나라다운 나라는 바로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라고 했다. 이를 위해 그는 “우리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이룩하기 위해, 한 사람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들은 기도하고 일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끝으로 그는 “박형규 목사를 만든 건 그를 위해 기도했던 어머니, 부인, 딸, 친구들 이었다”며 “기독교 집단지성이 박 목사님을 참으로 목사다운 목사로 만들었던 것”이라 강조했다.

한편 채희완(민족미학연구소 소장)은 ‘민속극 부흥운동과 기독교 민중문화운동’을, 오용식(무주지역자활센터장)은 ‘빈민운동(선교)의 선구자’를 발제했다. 논찬자로는 NCCK 손승호 간사가 수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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