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 오상아 기자] 한국조직신학회 제56차 신진학자 학술발표회 및 신년감사예배가 지난 12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서울신학대학교(총장 유석성) 백주년기념관 영성훈련실에서 열렸다. 이날 서울신학대학교 강사 김찬홍 박사는 'Robert C. Neville의 존재론적 신 이해와 다석 류영모의 없이 계신 하느님으로서의 신 이해 비교'를 주제로 발표했다.

김찬홍 박사는 "네빌은 기독교 창조 이론을 형이상학적 방법론으로 재해석하여 신의 초월성과 내재성 모두를 확증하려 하였다"며 "존재 그 자체로서의 신은 비확정적이지만 창조 행위 '이후' 혹은 이 세계와 창조로 관련 맺을 때에는 확정적 성격을 갖는다. 네빌에게 있어 신의 내재성은 모든 확정적 존재들을 창조하는 행위를 통한 그들 안의 현존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다석 류영모의 명상록 -진리와 참나' 표지

이어 "류영모 또한 인간의 이성이 닿을 수 없는 하느님의 초월성을 이야기하면서도 개별 피조물 안(인간의 마음)에서 경험될 수 있는 하느님의 내재성도 이야기한다"며 "네빌이 신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서구 철학적 신학의 방법론인 형이상학적 분석을 통해 확보했다면, 류영모는 유불선으로 대표되는 동아시아 종교 사상의 존재론적 신이해와 수행적 영성으로 하느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설명한다"고 말했다.

그는 류영모의 신론인 '없이 계신 하느님'을 소개하며 "자신의 책, '다석 류영모의 종교사상'에서 류영모의 신이해를 분석하면서, 김진은 류영모가 하나님 혹은 절대자를 매우 다양한 이름으로 정의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류영모는 신은 이름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인간의 구체적이고 특수한 상황과 생각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어진다고 보았다"고 했다.

이어 "류영모가 신 혹은 절대적 실재를 부르는 이름들은 크게 두 가지, 존재적인 잉름과 비존재적인 이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며 "류영모의 신이해에 있어 존재적 측면과 비존재적 측면 모두를 고려할 때, 그의 신 개념을 가장 잘 표현해 줄 수 있는 이름은 '없이 계신 하느님'이라고 생각한다. '없다'라는 신의 비존재적 측면과 '계시다'는 하나님을 존재적인 측면을 한 이름 안에 담고 있기에 그러하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하느님 이름에 대한 류영모의 생각과 유사하게, 네빌 역시 절대적 실재를 부르는 여러 이름들이 다양한 종교들을 통해 발전되어 왔다고 본다. 그러나 절대적 실재는 그런 이름들이나 모델들로 설명될 수 없고 그러한 이름과 모델들은 신적 실재에 대해 중요한 의미를 전달할 수 있을 때메만 의미를 갖는다고 말했다"고 덧붙였다.

또한 "절대적 실재에 대한 각기 다른 종교적 상징들에 대해 서로 이야기할 수 있는 근본적 신이해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네빌의 신 이해는 류영모를 포함한 동아시아의 절대적 실재에 대한 전통적 이해와 소통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며 "각기 다른 종교적 전통 사이에서 종교적 상징들을 서로 비교할 때, 이 상징들은 종교적 경험들의 확정적 차원들을 해석하는 대안적 방법이 될 수 있다고 Carl G. Vaught는 보았다"며 "이런 맥락에서 네빌은 신학은 임의적인 학문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신학은 언제나 불완전하기에 항상 교정될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는 것이다"고 했다.

김 박사는 "유영모 또한 불교, 유교, 도교, 기독교의 절대적 실재에 대한 이해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각기 다른 이런 상징과 해석들이 모두 절대적 하나인 없이 계신 하느님을 가리킨다고 보았다"며 "류영모는 상대적인 이 세계를 초월하는 절대적인 무엇이 실재한다고 믿었다"고 설명했다.

"...사람이 상대세계에 빠져 버리면 앎(知)이 굳어져 버리고 만다. 절대세계를 놓치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무엇이든지 다 아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된다. 그리하여 완고하고 교만해져 자기를 제일로 알게 되는 어리석은 생각에 빠진다.(1956)"(박영호 편, '다석 유영모 어록')

그러면서 그는 "불교에서는 절대적 실재를 인격적인 존재로 이해하지 않는다. 불교에서의 절대적 실재는 공(空)이다. 즉 본질의 완전한 부재에까지 이르러야한다는 것이다"며 "류영모가 하나님을 정의하기 위해 사용한 '빈탕한데'는 인간의 이성과 감각으로 닿을 수 없는 절대적 실재를 묘사하기 위한 존재론적 상징이다. 류영모는 일반적 번역인 공(空)보다는 절대공(絶對供)이란 표현을 더 즐겨 사용했다"고 했다.
또한 "절대적 실재인 신이 공(空)이고 마음이 공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면, 류영모에게 있어서 하느님은 우리 밖이 아닌 우리 마음 안에서 찾아야 한다"며 류영모의 글을 인용했다.

"하느님은 종당엔 나의 참나(眞我)다. 나가 있으니 하느님도 계시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나는 참나의 그림자와 같기 때문이다. 참나가 없으면 이 나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거짓나인 제나(자아)에 사로잡혀 큰나요 참나인 하느님을 멀게 생각한다.(1960)"(박영호 편, '다석 류영모 어록')

덧붙여 "류영모는 오직 우리가 이기심이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 참나(眞我)로 존재할 수 있게 되며, 이때 비로소 하느님이 우리 안에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며 "마음의 비움이 참나라는 의미는 우리 안에 신적 속성이 선재한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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