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취임 후 첫 3·1절 기념사에서 일본을 “협력 파트너”라고 지칭했다. 역대 대통령들이 사과와 반성을 요구해 온 일본을 향해 “과거 군국주의 침략자에서 지금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고 안보, 경제, 글로벌 어젠다에서 협력하는 파트너로 변했다”라고 했다.

윤 대통령의 올해 3.1절 기념사는 아무래도 낯설다. 그건 과거 역대 대통령들이 했던 3·1절 기념사와 내용과 방향성에서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역대 대통령들은 3.1절 기념사에서 일본에 대해 날선 비판을 쏟아내는 게 예사였고 특히 취임 후 첫 3.1절엔 유독 강도가 더 셌다.

그런데 올해 3.1절 기념사가 낯설게 느껴지는 건 이전 대통령들처럼 일본을 공격하는 어투가 아니어서만은 아닐 것이다. 일본을 향한 시선이 완전히 다른 곳을 가리키고 있어서다. 일본을 향해 “가해자”라는 표현 대신 “파트너”, “사과와 반성”이 아닌 “협력”을 강조한 것이 그랬다. 한일관계가 ‘과거’에서 ‘미래’로 바뀌어야 한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야권은 윤석열 대통령의 3.1절 기념사를 두고 맹비난을 쏟아냈다. 민주당은 “매국노 이완용 말과 무슨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다”라고 했다. 심지어 중국 관영 매체까지 “이례적인 아첨”, “몽유병”이라며 거칠게 비난에 가세했다.

그런데 이런 반응이 아주 이해가 안 되는 게 아니다. 그 어떤 정부도 3.1절에 일본의 사과와 배상을 외치지 않은 정권이 없었고 반성과 자성을 요구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그러니 윤 대통령이 던진 새로운 화두가 낯설고, 그런 화법에 쏟아지는 비판과 비난이 도리어 자연스러울 정도다.

우리 정치는 반일에 아주 익숙하다. 두 나라 사이에 불편한 이슈가 생길 때마다 반일 감정을 자극하고 그 반사이익을 누려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정치 외교로 풀어야 할 사안에 국민감정을 이입시키다 보니 한일관계는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과거에 대통령들이 행한 3.1절 메시지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다.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우리 민족이 당한 고통에 대해 사과와 반성을 촉구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말로만 하던 걸 문재인 정권은 행동으로 옮겼다. 대표적인 예가 박근혜 정부가 일본과 한 위안부 합의를 파기한 일이다. 청와대는 연일 ‘노 재팬’ ‘죽창가’를 불러대며 반일 감정을 자극했다.

21세기에 ‘친일파’ ‘토착 왜구’ 등의 봉건주의시대 용어를 동원해 공격하는 건 분명 시대착오적이다. 문제는 그게 한국 정치에서 먹힌다는 점이다. 이전 정부에서 가까스로 봉합했던 과거사 문제를 “흠결을 발견했다”며 원점으로 돌린 정권이 노린 것도 반일 감정이라는 과거의 유물이다.

이런 식의 감정적 반일은 과거 군사정권 시절에 자주 쓰던 방법이다. 일본의 내각이 신사를 참배하고 독도 영유권을 주장할 때마다 서울 도심 한 가운데선 격한 반일 시위가 벌어지곤 했다. 방송은 시위자가 자신의 손가락을 칼로 잘라 혈서를 쓰고 광경을 그대로 보여줬다. 반일을 정치의 수단으로 삼는 ‘일본 때리기’는 군사독재든 민주정부건 가리지 않았다.

그러나 울분에 가득 찬 적개심이 문제를 해결해 줄 리 만무하다. 두 나라 사이를 ‘가깝고도 먼 나라’에서 ‘멀고 먼 나라’로 만들었을 뿐이다. 일본이 2019년 수출규제 조치를 취하자 정부가 한·일군사보호협정(GSOMIA) 종료선언을 하는 등 보복에 맞 보복으로 대응해 얻은 건 국익이 아닌 우리 기업의 무한 희생이다.

이젠 이런 감정적 반일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할 때가 됐다. 일본은 한국인의 반일감정을 ‘혐한’으로 되갚으며 국제사회에서 역사왜곡과 독도 영유권 주장을 더 당당히 하고 있지 않나. 반성하지 않는 일본에 끊임없는 반일로 대응하려면 대안도 제시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윤 대통령이 일본을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고 안보, 경제, 글로벌 어젠다에서 협력하는 파트너”라고 한 건 현재의 국제관계를 직시한 냉정한 진단이다. 북핵 위기가 사라지지 않는 한 한·일, 또는 한·미·일 3각 공조는 필연적이다. 욕을 먹더라도 우리의 안보, 우리의 경제, 우리 국익을 위해 일본이 필요하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국익을 앞세워도 과거사 문제가 정리되지 않으면 한·일 관계는 말끔히 복원될 수 없다. 역사문제는 시간이 흘렀다고 과거가 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한·일 사이에 시급한 현안인 강제동원 배상 문제와 관련해 한·일 당국자 간에 협의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소식은 매우 반갑다.

불행했던 과거를 잊지 말아야 하는 건 어쩌면 우리 모두의 숙명이다. 그러나 잊지 않는 것과 과거에 머물러 있는 건 다르다. 과거에 사로 잡혀 미래를 포기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이전 세대가 불행했다고 자라나는 다음 세대에게까지 그 불행을 물려줄 수는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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