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9일 주일은 한국교회가 지키는 추수감사절(주일)이다. 추수 감사절은 영국의 청교도들이 종교적 박해를 견디다 못해 신앙의 자유를 찾아 63일간의 항해 끝에 미국 동부의 플리머스(Plymouth)에 도착한 후 그 이듬해 추수를 끝내고 하나님께 찬송과 기도로 감사의 예물을 드린 데서 유래된 교회 절기다.

당시 청교도들의 신대륙 이주는 매우 험난한 여정이었다. 1620년 8월 15일에 미 대륙을 향해 출항했으나 도중에 배가 고장 나 귀항했다. 배를 수리하고 한 달여 만인 9월 6일에 다시 항해를 시작한 102명의 청교도들은 두 달 후인 11월 중순에야 플리머스 해안에 당도하게 된다.

그런데 이들을 맞은 건 눈보라 치는 혹독한 추위와 오랜 항해로 쇠약해진 신체에 찾아온 갖가지 질병이었다. 도착한 지 2~3개월 만에 50여 명이 병에 걸려 죽음을 맞았다는 사실에서 당시 환경과 여건이 얼마나 열악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렇게 모진 겨울을 견딘 청교도들은 이듬해 봄부터 황무지를 개간하고 씨를 뿌리는 등 농사를 시작했다. 주위에 있던 원주민인 ‘아메리칸 인디언’들이 이들의 첫 농사를 도왔다. 그렇게 해서 그해 가을 추수의 첫 결실을 하나님께 드리게 된 것이다. 이들이 하나님께 드린 감사의 예물은 성경에 “울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시126:6)”는 말씀이 그대로 실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청교도들이 단지 첫 농사의 결실만을 감사예물로 드린 것만은 아니다. 이들은 미국에 정착한 후 가장 먼저 교회부터 지었다. 그 다음 학교를 세우고 자신들이 거처할 집을 지었다. 오늘날까지 신앙인이 갖춰야 할 기본 덕목이 된 주일 성수, 십일조, 경건생활이 이들 청교도에 의해 시작돼 한국교회에까지 이어진 셈이다.

이렇듯 미국에서 시작된 추수감사절은 선교사들에 의해 초기 한국교회에 그대로 유입됐다. 마침내 1908년 예수교장로회 제2회 대한노회에서 11월 마지막 목요일을 ‘감사일’로 정했고, 이후 몇 번의 날짜 조정을 거쳐 한국교회 대부분이 11월 셋째 주일을 추수감사주일로 지키고 있다.

그런데 이런 뜻깊은 절기를 교회력대로 지키는 교회가 점점 줄어드는 추세다. 그건 한국의 농사 절기와는 맞지 않는 데다 대도시 교회의 경우 농사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국의 논농사와 가을걷이는 대부분 10월 말이면 끝나기 때문에 11월 중순에 추수감사절을 지내는 것이 절기적 특성에 동떨어진다는 지적이 있다.

이런 움직임에 따라 최근엔 10월 중순으로 추수감사절을 한 달 앞당기거나 아예 추석 한가위에 맞추는 경향도 나타나고 있다. 이런 흐름은 토착화의 한 현상이기도 하나 절기 감사헌금에 참여하는 교인들로 하여금 두달 간의 텀을 둬 부담을 줄여주려는 의도로 풀이하는 이들도 있다.

한국교회는 전통적으로 부활절, 맥추감사절, 추수감사절, 성탄절 등 4절기를 지킨다. 이 절기는 각기 교회력에 따른 것이나 성도들이 절기 특별헌금에 참여한다는 점에서 다른 절기와 구분된다. 4절기에 성도들이 감사헌금을 드리는 건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에 비쳐볼 때 이상할 게 없다. 다만 각 절기가 가진 고유한 의미는 퇴색되고 특별헌금을 하는 날로 굳어지는 주객이 전도된 격이다.

교회가 제정해 실시하는 절기 특별헌금은 교회를 유지하고 운영하는 데 있어 큰 보탬이 된다. 코로나19 이후 교회 재정이 어려워져 목회자들이 이중직을 갖는 사례가 늘고 있지만, 목회자는 교인들이 드린 헌금으로 생활하는 게 원칙이다.

그런데 교인들이 드린 각종 헌금이 목회자 한 사람의 생활비도 충당하지 못하는 형편의 교회들이 허다하다. 현실적으로 상가 임대교회 등은 목회자 사례비는 고사하고 월 임대료도 못 내는 형편이라 선교와 교육, 구제비 지출은 꿈같은 얘기일 수밖에 없다.

과거 청교도들은 추수감사절에 자신들이 춥고 배고플 때 먹을 것과 거처할 곳을 마련해준 원주민들을 초대해 감사의 잔치를 열었다. 그런 점에서 추수감사절의 본래의 의미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감사를 어려운 이웃과의 나눔으로 실천하는 데 있었다.

미국 이민교회 사이에서 코로나 팬데믹으로 어려움에 빠진 교회들을 돌아보는 ‘위브릿지’ 운동이 교계에 신선한 주목을 끌게 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는 교회가 어려운 교회를 물질적으로 지원하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비슷한 처지에 있는 교회들이 마음을 나누고 상생을 도모하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번 추수감사절에 교회마다 많은 계획이 있을 것이다. 한가지 바람을 보태자면 나도 어렵지만 나와 같이 어려운 교회의 사정을 살피고 서로를 돌보는 생상의 감사, 내가 여유가 없는 가운데 나보다 더 힘든 이웃에게 따뜻한 마음과 정성을 전하는 나눔의 감사를 실천하는 절기가 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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