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대 석좌교수 김순권 박사 인터뷰
국제옥수수재단 이사장 겸 한동대 석좌교수 김순권 박사 ©기독일보 노형구 기자

옥수수 육종으로 '아프리카와 북한의 기아 문제 해결'에 기여

[기독일보 노형구 기자] 북한과 아프리카의 척박한 환경에도 잘 자라는 옥수수 품종 개발로, 옥수수 증산에 크게 기여한 김순권 박사. 이런 업적으로 그는 노벨 평화상 후보에 올랐고, 농업계의 노벨상인 국제농업연구대상(벨기에 국왕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그는 “상보다 타인을 위해 사는 삶이 훨씬 가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북한에서 약 500만 명의 기아 문제를 해결했다고 자부한다. 현재 북한과 아프리카에서 재배되는 옥수수 품종의 50% 이상은 김순권 박사 연구팀이 개발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박사는 ‘옥수수 하나로 세계 기아 문제를 해결 하겠다’는 옥수수 외길 인생에 대해, “하나님이 내게 사명을 주셨기 때문”이라고 역설했다. 현재 한동대 석좌교수로서 왕성한 옥수수 육종 연구에 전념하고 있는 김순권 박사. 개화동 국제옥수수재단 사무실에서 7일 그와 인터뷰를 가졌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

Q : 김순권 박사님께서 진로를 농대 농학과로 선택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그리고 어떤 신앙 배경이 김 박사님을 옥수수 외길 인생으로 인도하셨는지 듣고 싶습니다.

A : 부산상고 입시에 떨어져 1년 동안 울산 앞바다에 벼 농사지었습니다. 그 때 벼 도열병이 와서 100% 죽었지요. 굉장히 독한 농약을 쳐서 농약에 중독됐습니다. 거의 죽을 뻔 했지요. 그래서 농사를 안 지어도 되는 상고나 농협 협동조합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이마저도 실패했습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울산 농고 들어갔습니다. 당시 울산 농고는 60%가 농장 실습이었죠. 농사에 잔뼈가 굵은 나에겐 물 만난 고기였습니다.

그러다 고 2때 한 여학생을 짝사랑 했습니다. 그 여학생이 교회를 다녀서 신앙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에 다니다 보니 진지하게 물음이 들더군요. ‘내가 왜 이 세상에 태어났는가?’, ‘내가 사는 목적은 무엇인가’ 등이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무얼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났는가를 정말 고민했지요. 결국 울산 농고에서 농업도 적성에 맞았고, 신앙 배경 때문에 “세상에서 태어난 이상 내가 농업을 통해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자”는 결심으로 경북대 농학과에 진학했습니다.

Q : 옥수수 하나로 인류 기아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사명감을 가진데 큰 영향을 줬던 성경 말씀이나 신앙 선배들이 계셨던가요?

A : 경북대 1학년 때 대구제일교회에 다녔습니다. 당시 이상건 목사님의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됐다”는 설교 들었어요. 나처럼 IQ도 가정배경도 안 좋았던 내가 하나님께 붙들리면, ‘하나님의 심부름을 할 수 있지 않나’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긍정적 마인드도 생겼고요. 이것이 옥수수 육종 개발을 계속할 수 있던 원동력이 됐습니다.

그리고 고려대 대학원 3학기를 마치고 인턴으로 농업 진흥청에 들어갔어요. 당시 미국에서 유학 제안도 왔던 상황이었습니다. 도미 직전 한경직 목사님이 시무하시던 영락교회에 가서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분은 에스겔 33:7절의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삼음이 이와 같으니라 그런즉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 할지어다”를 가지고 설교하셨는데, 이스라엘 민족을 한국 민족으로 바꿔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설교를 듣고 사명감이 더 세워졌지요. 한국 민족을 살리는 파수꾼으로 살자는 마음을 품었습니다.

이는 ‘옥수수로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을 잘 먹고 잘 살게 해줬으면 하는 사명감’으로 이어졌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사명을 주셨죠. 옥수수를 통해서 한국을 살리고 세계를 살리자는 소명 말입니다. 앞서 들은 두 가지 설교 말씀을 품고 미국에서 옥수수 붙들고 끈질기게 공부했습니다. 이런 원동력은 결국 신앙에서 나온 것입니다.

당시 일리노이 대학교 연구과정을 거치고 하와이 대학교에 들어가 석·박사를 3년 만에 땄습니다. 그 학교 역사상 최단기로 박사를 땄다고 하더군요. 일리노이 대학에 있었을 때 연구원들은 내게 “김순권은 옥수수를 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평가했어요. 한 마디로 옥수수에 미친 사람이었죠.

미국에서 치질 수술의 부작용으로 졸도해 죽음 직전까지 갔고, 교통사고도 당해 죽을 뻔 했습니다. 아프리카에서도 말라리아에 걸려 수없이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런 나를 수없이도 살려주셨죠. 하나님께서 죽기 전 반드시 나를 지켜주실 것이라는 생각으로 버티고 또 버텼어요. 그런 어려움이 왔을 때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했던 것 같습니다. 이 모든 건 신앙 때문에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Q : 결국 옥수수 육종으로 기아 문제 해결하고 싶다는 하나님의 사명이 김 박사님의 진로 선택에 핵심이었네요?

A : 네 그렇습니다. 74년에 박사를 따고 미국 농업 회사인 파이디아가 월 3000불로 저를 스카우트하려고 했어요. 당시 농업 진흥청 월급은 고작 47불이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농업 진흥청 입사했습니다. 돈 보다는 사명을 위해서. 가난한 대한민국이 굶주림에서 해방시켜 주기 위해 농진청에 입사했습니다. 기본적으로 공무원은 국가를 위해 희생하는 종이 돼야한다는 마인드여야 해요. 저는 매일 새벽기도 드리고 저녁 11시 반에 퇴근했어요. 당시에는 일반 공무원들처럼 철밥통으로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47불 월급으로 내 조국 대한민국을 위해서 죽어도 좋다고 당시에 생각했어요. 요새 젊은 사람들 너무 돈만 밝히는 것도 안 돼요.

한동대 석좌교수 김순권 박사 인터뷰
국제옥수수재단 이사장 겸 한동대 석좌교수 김순권 박사 ©기독일보 노형구 기자

Q : 하와이 대학교에서 농학 박사를 받으신 후, 74년부터 농진청에서 병충해에 강한 옥수수 육종 개발에 집중하셨습니다. 국내 옥수수 증산에도 크게 기여하셨는데요. 70년대 대한민국은 당시 보릿고개 등 우리나라가 식량 부족을 겪고 있었을 때인데, 하필 쌀이 아닌 옥수수 품종 개량을 선택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A : 당시 농업 진흥청에서 인턴을 할 무렵, 쌀 연구 TO가 없어 옥수수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점차 옥수수가 중요하다는 걸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도미해 옥수수로 박사 취득 후, 농진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76년도에 수원 19호라는 옥수수 품종을 개발했습니다. 당시 강원도 전체 농가 소득이 연 400억이 늘어났어요. “내 1분은 10만원이다. 농민들 전체 수익 400억이 곧 나의 월급”이라는 생각으로, 시간 절약하면서 연구하고 공부했습니다.

Q : 79년에 국제열대농업연구소 초청으로 17년 동안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에서 병충해에 강한 옥수수 종자 개발에 일조하셨습니다. ‘악마의 풀’로 풀리는 스트라이가 바이러스에 강한 옥수수 종자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특이할 점은 스트라이가 바이러스를 죽이는 옥수수 종자 아닌 ‘공생’하는 종자입니다. 왜 하필 공생인가요?

A : 53년 육종 유전을 해보니까. 자연의 진화라는 건 반드시 공생을 해야 합니다. 진화는 공생을 하는 방향으로 되어 갑니다. 육종 공부를 해보면서 압니다. 유전 인자 두 개가 있어요. 하나는 100% 강한 스트롱(Strong) 유전자. 다른 하나는 95% 정도 강한 위크(Weak) 유전자입니다. 100% 강한 건 반드시 돌연변이를 일으킵니다. 자연의 원리는 병해충들도 살아남아야 해요. 이들을 없애려 할수록 더욱더 돌연변이가 발생합니다. 농약을 쳐서 마구 병해충들을 컨트롤 하면 할수록 농약에 대한 내성이 마구 뻗칩니다.

53년 동안 옥수수와 병해충 간 공생을 연구해왔습니다. 병해충을 없애는 것이 아닌 병해충과 공생하면서 사는 옥수수 종자 개발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람이 불 때 벼가 뻣뻣하면 부러지기 마련입니다. 반드시 같이 살아가야 해요. 인생 살아가면서 자기 혼자 너무 잘났다고 살지 말고, 손해 볼 때도 있어야 해요.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야 하죠.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죠. 자기가 끌려 다닐 때도 있어야 하고요. 이런 연습이 인생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Q : 아프리카 환경에 잘 적응하는 옥수수 종자 개발을 하면서 반대가 심했다고 들었습니다. 미국, 유럽 등 선진국의 농학자들, 국제 농업 자본들의 견제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반대가 있었다면 그러한 상황과 이를 어떤 마음으로 극복하셨는지 듣고 싶습니다.

A : 79년도 나이지리아에서 육종 개발을 성공한 후, 연 옥수수 100만 톤 증산에 성공했습니다. 그렇게 되고 나서 유엔(UN) 및 국제 농업 자본들이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농업 자본들이 유엔에게 심지어 “나를 파면시키라”고 압박을 가했습니다. 나는 유엔에게 “가난한 사람들 도우라고 나를 스카우트 했는데, 이제 와서 나를 파면하라니 무슨 소리냐”고 반발했습니다.

아프리카는 유럽 등의 식민지 생활을 100년이나 겪었습니다. 아프리카가 발전하면 할수록 유럽이 곤란할 수 있어요. 심지어 유럽 농학자들은 “아프리카가 잘 되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적당히 돕자는 식이었어요. 나는 일본의 식민지배 당한 대한민국 출신으로 식민지 아프리카의 아픔에 깊이 공감했죠. 이런 공감대가 아프리카 사람들을 돕는 원동력이었던 같습니다.

당시 아프리카 식민지 국가들에게도 안타까웠던 점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우리나라 경제 발전 현황은 잘 분석해요. 우리나라가 자원도 없지만 세계 GDP 10위권에 오른 경제 성장 말입니다. 아프리카 개발도상국은 우리나라보다 자원도 풍부합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개발도상국입니다. 이유는 무얼까요? 그 나라에 애국자들이 없어요. 극히 일부만 잘 살겠다는 마인드가 문제에요. 당시 아프리카 국민들이 전반적으로 나라를 위해 봉사하겠다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Q : 아프리카에서 자체적으로 옥수수 수확량이 늘면서 아프리카 사람들의 굶주림에 크게 일조하셨습니다. 1998년부터 국제옥수수재단 이사장에 취임해 북한 농업 과학원과 옥수수 프로젝트를 오랫동안 진행하셨습니다. 구체적인 성과에 대해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A : 79년도부터 나이지리아에서 옥수수 육종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나이지리아는 연간 100만 톤의 옥수수를 생산 하는데도, 식량이 부족해 100만 톤을 미국으로부터 수입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개발한 옥수수 품종으로 지금은 연간 생산량 1000만 톤까지 늘어났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재배되는 옥수수의 50% 이상은 우리 연구팀이 개발한 것입니다. 북한도 50% 이상이 수원 19호+이외 12종입니다. 옥수수 재단의 연구개발 때문에 북한에선 연간 100만 톤이 증산됐지요. 옥수수 재단이 없었다면 아마 북한에선 500만 명이 이상이 굶어 죽었을 것입니다.

Q : 북한의 옥수수 증산에 크게 기여하셨는데, 보수 기독교 일각에선 북한에게 식량 원조를 반대하는 입장도 있습니다. 이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A : 나는 북한 정권을 도우 자는 게 아닙니다. 죽어가는 동포를 돕고 싶어요. 옥수수도 로켓 같이 생겼잖아요? 옥수수 쏘아 올리라고 북한 과학 연구원이 제게 연구를 요청 했을 때 승인해준 겁니다. 국제 옥수수재단에 단 1만 원 후원으로 종자와 비료 값만 대주면, 북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남한 정부는 단호하게 북한 정권에게 돈 같은 것을 지원해주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북한 주민들에게 옥수수 종자를 줘서 스스로 땀을 흘려 농사를 짓도록 도와야 합니다. 내가 하는 건 북한 환경에서 잘 자라는 옥수수 품종 개발입니다. 우리나라는 북한이든 어디든 ‘퍼주기식’ 지원이 아니라, 종자를 개발해서 그 나라 국민들이 종자를 심어 땀을 흘려 재배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아프리카도 마찬가지고요. 개발도상국 국민들이 스스로 농사를 지어서 일어 설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동대 석좌교수 김순권 박사 인터뷰
김순권 박사가 당시 98년도 북한에 비료 지원 했을 때 십자가가 새겨진 포대를 보여주고 있다. 그 아래는 지원에 동참했던 교회 이름이 적혀 있다.©기독일보 노형구 기자

Q : 북한 옥수수 개발 지원 사업을 하시면서 총 57번의 방북을 하셨는데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으신지요?

A : 아내가 98년도에 나와 같이 방북하면서, 1살 때 헤어진 오빠를 만났습니다. 집사람이 북한에서 태어나 전쟁 중 국제시장 배를 타고 남한으로 왔거든요. 47년 만입니다. 그런데 제가 김정일 위원장에게 “왜 내 아내만 만나게 해주냐”고 따졌습니다, 남한에서 죽기 직전의 할아버지·할머니들도 이산가족 만나게 해줘야 한다고 따져 물었더니, 김 위원장이 이산가족 상봉을 추진하더군요. 그래서 성사된 것입니다. 나는 언제 김 위원장에게 “기독교 신앙 없이는 북한 과학원과 옥수수 종자 개발 할 수 없다”고 우겼어요. 그러더니 98년 1월에 김정일 위원장은 내게만 종교의 자유를 허락해 줬지요. 김정일 위원장은 나를 남조선 깡패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김대중 정부 당시 남한 교회가 지원해준 비료포대에 십자가 마크가 있었습니다. 김정일 위원장이 십자가를 빼라고 지시했거든요. 그런데 나는 절대 안 된다고 했습니다. 빼면 비료 안 주겠다고 김 위원장에게 끝까지 우겼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마크가 새겨진 평화의 옥수수가 됐지요. 그 아래는 지원해준 남한 교회 이름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십자가를 끝까지 고수했던 건 옥수수 지원 사업이 잘 안될 경우 우리가 십자가 지겠다고 하는 결기였지요. 결국십자가 마크가 찍힌 160만 비료 포대가 북한 전역에 널리 퍼지게 됐습니다.

Q : 현재도 왕성한 연구활동을 하고 계신데요. 진행하시는 연구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A : 세계 기후 변화를 생각하는 옥수수 육종 개발을 하고 있어요. 지금까지 옥수수 알맹이를 가지고 바이오 에탄올을 생산했는데, 사람이 먹는 식량으로 만들다보니 전 세계적으로 식량 파동이 왔던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게 옥수수 잎을 이용해 바이오 에탄올을 생산하자는 것입니다. 생물자원에서 에너지를 추출하는 친환경 연료입니다. 2011년부터 포스코(POSCO)의 연구 지원으로 시작했습니다. 중국으로부터 옥수수 잎을 수입해서, 바이오 에탄올 뽑는 연구를 추진했습니다. 그러나 중국이 갑자기 친환경 사업을 막아 좌초됐죠.

현재는 정부 연구비 없이, 모금만으로 국제 옥수수재단이 연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약 70-80%는 기독교인들이 동참하고 있습니다. 이런 건 정부에서 연구비 지원을 해야 합니다. 이건 국민 모금으로 할 일이 아니죠. 그리고 검정 약 옥수수 육종도 개발 중입니다. 원래 조류 독감 치료약을 발명하려고 이 품종을 연구했는데, 이것이 당뇨에도 좋다는 결과가 있어서 이를 초점으로 연구하고 있습니다.

Q : 선생님께서 그 간 옥수수 종자 개발로 노벨 평화상 5번, 농업분야의 노벨상은 국제농업연구대상(벨기에 국왕상)을 수상하셨습니다. 요새 초·중·고등학생 진로 1위가 공무원이라고 합니다. 과학자는 상대적으로 후순위에 밀려있고요. 꿈을 잃어버리고 사명을 잃어버린 시대, 한동대 학생들에게 그리고 초·중·고 학생들에게 진로 선택에 있어 해주실 말씀은?

A : ‘내가 이 땅에 사는 목적이 무엇인가’라는 사명이 있어야 해요. 욕심을 부리지 말고 내가 바보라도 누구라도 각자가 잘 할 수 있는 분야는 있거든요.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기 일이 매우 중요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자기 스스로 평가 절하하면 안 돼요. 긍정적인 마인드가 매우 중요해요. 그리고 내가 하는 일이 좀 천천히 되도 아무 문제없어요. 나는 53년 동안 옥수수 한 분야를 파면서, 삶에 기복이 있어도 다급하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주어진 시간을 남을 위해서 무얼 할 것인가 고민하면서 옥수수 연구에 전념했습니다. 나 자신만을 위해서 사는 게 아니에요. 남을 위해서 남기는 인생. 그렇게 생각하면 인생이 재밌어져요.

다른 사람을 위해 나누는 그런 인생이 매우 중요합니다. 받아먹기보다 남한테 주는 연습을 해야 해요. 그러다 보면 인생에서 좋은 일도 많이 생기고 꿈도 크게 될 것입니다. 자기만의 성공이면 인생에서 남는 게 없어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꿈을 크게 가져 전 세계 60억 인구를 위해 기여하겠다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해요. 무엇을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까? 이를 생각하면 젊은이들은 계속 스마트폰 가지고 시간 낭비할 수 없어요.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사랑할 때 위인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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