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관리소와 교화소 위치
북한 관리소와 교화소 위치 ©오픈도어선교회

탈출에 실패하고 집결소로 끌려갈 때는 그 길이 죽음의 길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곳에 하나님의 놀라운 예비하심이 있는 줄 누가 알았으랴.

집결소에 가서도 강제노동은 피할 수 없었다. 집결소에 도착했을 당시는 여름이었다. 우리는 주로 김매기를 하러 다녔다. 인솔하는 간부를 따라 농기구도 없이 그냥 맨 몸으로 줄 세워서 언덕을 올라가보니 넓은 콩밭이 있었다. 거기서 모두 엎으려 일하라고 지시를 받았다. 도구가 없으니 당연히 맨손으로 콩을 돋아주고 잡초도 뽑는 작업이었다. 맨손으로 김을 매니 손이 안 다칠 수가 없었다. 비료도 없어 그저 척박한 땅은 딱딱하게 굳어 흡사 돌덩어리 같았고, 그 땅을 손으로 갈아엎으려니 손 끝에 피가 나고 손바닥이 다 헐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콩밭은 간부 가족의 밭 이었다.

새벽에 식전 작업도 있었다. 간부는 집결소 화장실에 인분 말린 것을 가지고 매고 올라가라고 지시했다. 자루에 냄새가 정말 지독했다. 코를 찌르는 냄새를 애써 외면하며 길을 올라가니 무와 배추를 심기 위해 밭을 갈아놓은 곳이 있었다. 그 곳에 장갑도 없이 맨 손으로 인분 말린 것을 쭉 뿌리고 그 위에 씨를 뿌렸다. 식전 작업으로는 최악이었다. 제대로 손 씻을 곳도 없으니 그 구린내 나는 손으로 밥을 먹어야 했다. 간수들의 취급도 그렇고 실제로도 그렇고 인간다움이 전혀 없는 완전한 짐승의 생활이었다.

숙소 배치가 있었다. 우리 숙소로 배정된 곳을 보니 두 평도 안될 것 같은 곳에 32명이 배치가 되었다. 낮에야 다 일 나가니까 그렇다지만 밤에 잠을 청하려고 하면 32명이 누울 만한 공간은 도저히 나올 수가 없었다. 별 수 없이 서로 다리를 접고 기대며 눕는데 이와 빈대가 득실거렸다. 생활 환경이 너무 열악하다 보니 감방 안은 다들 불평불만이 가득했다.

그런데 그 중에 특이한 사람이 있었다. 한 60대 초반쯤 되었을까 싶은 할머니였다. 이 할머니는 눈빛이 초롱초롱하고 말하는 것이 참 긍정적이었다. 이 곳에 뭔 긍정적일 만한 것이 있는지 신기하다싶어서 왜 그런가 하고 물어보니 할머니가 자기를 공주라고 했다. 특이한 것을 넘어서 무슨 미친 사람이 다 있다 생각하고, 어의가 없고 기분이 나빠서 나도 다 젊을 때는 잘 대우받았다고 하면서 쪼글쪼글한 할머니가 미쳤다고 욕하고 지나쳤다.

그러면서 나는 속으로 자기가 공주라고 하니 혹시 부자집 딸인가 하고 생각했다. 미쳤다고 지나친 그 할머니는 그 이후에도 계속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어떻게 살던 사람 이길래 이 짐승 같은 생활 속에서도 이렇게 평온한 모습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괜히 시기가 났다. 게다가 할머니는 계속 자기는 곧 나간다고 말했다. 아무래도 무슨 부자 친척 이라도 있는 것 같다. 신기하기도 하고 호기심도 생기고 좋은 관계로 지낸다고 손해 볼 것은 없으니 할머니와 친하게 지냈다.

친해지니 자연스럽게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 할매는 중국에서 10년 만에 북송 당했다. 자녀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15년 전 즈음에 북에서 차 사고로 며느리와 함께 죽었고 5살배기 손자만 남겨졌다고 했다. 할머니 혼자서 도저히 5살배기 손자의 생계까지 책임지며 살수 없어서 꽃제비 짓을 하며 겨우 먹고살면서 먹을 것을 찾아 떠돌다 보니 강변까지 흘러 흘러 오게 되었었단다.

그리고 밤에 불빛이 켜져 있는 곳을 보고 거기 가면 밥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을까 싶어서 손자와 함께가서 문을 두드리니 집 주인이 왠 일로 반갑게 맞아주었단다. 그 사람들이 우리를 가만히 보며 “물 건너 오셨지요? 잠깐만 기다리소” 하고는 곧 이어 밥을 주는데 너무 굶주린 터라 정신 없이 먹었다고 한다. 그런데 밥을 한참 먹고는 정신을 차리고 방을 둘러보니 북한에는 어느 집에나 있는 김일성, 김정일 초상화가 안 보였단다. 아 이 동네 이상하다… 하는 생각에 그 집주인에게 “이 마을 이름 뭐에요?” 하고 물었더니 아뿔싸, 중국이었다. 할머니는 자기도 모르게 강을 건너고 말았던 것이다.

할머니는 큰일 났다는 생각에 손자를 데리고 바로 집을 빠져 나왔단다. 그렇지만 컴컴한 밤중에 어디가 강인지 어디가 길인지도 잘 모르겠고 일단 숨어야겠다는 생각에 언덕에 올라 숲에 몸을 숨겼다. 기온이 떨어지고 날씨가 추워지니 손자가 부들부들 떠는데 할머니마음에 밥 얻어먹은 집에 하룻밤만 신세를 질 것을 그랬는가 하며 후회가 되었단다. 그러다가 옷이라도 빌려야겠다고 하고 용기를 내어 언덕을 내려왔는데 어떤 차가 지나가다가 할머니를 보고 창문을 내리고 한국말로 어디서 오셨냐고 물었다. 너무 놀란 할머니는 대답도 못하고 있는데 그 차에 있던 사람이 마을 가지 말고 숨어서 5분만 기다리면 다시 데리러 오겠다고 했다. 그 말대로 숨어 있었더니 과연 차가 다시 와서 할머니와 손자를 태워갔다. 그 차는 두 사람을 멋있는 집에 데리고 갔고 자기는 공주의 삶을 살았다고 한다.

할머니 이야기를 들으니 너무 부러웠다. 이 할머니는 중국에서 탈북해서 공주로 살았다는데 나는 왜 재수 없이 팔려 다니고 시골 촌동네로만 떠돌았는가? 화가 나고 부럽기도 했다. 할머니는 그런 내 모습을 보면 자기가 시킨 대로 하면 나도 좋은 일이 많이 생길 거라고 했다. 할머니와 내 모습을 비교하며 재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던 터라 어떤 비법이 있다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비법이 뭔가? 할머니가 가르쳐준 방법은 매우 간단했다. 짧은 문구를 외우는 것이다.

“하나님 감사합니다.”“오늘 하루도 지켜주세요.”그리고 이어서 마음에 소원을 다 말하고“예수님 이름을 기도합니다 아멘” 하면 된다고 했다. 눈을 감고 해도 되고 눈 뜨고 해도 괜찮다고 했다. 나는 하나님의 “하”자도 들어본 적이 없었고 중국에서도 워낙 촌 동네 살다보니 교회도 없었던지라, 이것이기독교에서 말하는 기도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고 그냥 따라서 했다.(계속)

*드보라 탈북민 선교사의 간증은 오픈도어 6월호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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