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스콧 솔즈의 기고글인 '시기심에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질 때 되새겨야 할 네 가지 진리'(4 truths to speak when envy says you’re not enough)를 10월 18일(현지시각) 게재했다.
스콧 솔즈는 복음 중심의 관점에서 지도자들이 품위와 목적의식, 정서적 건강을 갖추고 살아가도록 돕는 ‘헬시 리더스(Healthy Leaders, Inc.)’와 ‘시커모어 커뮤니티(The Sycamore Community)’의 설립자다. 30년 넘게 목회하며 뉴욕과 내슈빌의 주요 교회에서 사역했고, 캔자스시티와 세인트루이스에서 교회를 개척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만족스럽던 하루가 단 몇 분 만에 흔들리는 기분을 우리는 잘 안다. 다른 사람의 결혼생활과 소유, 경력과 지위, 순탄해 보이는 삶을 보는 순간 마음이 가라앉는다. ‘왜 저 사람에게는 있고 나에게는 없을까.’ 조금 전까지 만족하고 감사하던 마음이 사라지고, 자신이 한없이 작고 부족하게 느껴진다.
필자는 최근 출간한 책 『자비의 왕(The Mercy King)』 4장에서 시기심을 이렇게 설명했다.
“시기심은 기쁨과 만족이 언제나 손에 닿지 않는 곳에 있다고 말한다. 성취 하나, 소유 하나, 관계 하나만 더 얻으면 만족할 수 있다고 속인다. 그러나 복음은 다른 이야기를 전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이미 주어졌다. 흔들리지 않는 사랑과 사라지지 않는 소속감, 우리의 성과에 좌우되지 않는 미래다.”
비교가 우리를 사로잡는 이유는 자신이 누구이며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확인하고 싶기 때문이다. 비교는 다른 사람을 앞서면 중요성과 안정감을 얻을 수 있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그 자리에 도달하면 기준은 다시 멀어진다.
기독교에 비판적이었던 버트런드 러셀도 이러한 문제를 지적했다. 영광을 원하는 사람이 나폴레옹을 부러워하더라도 나폴레옹은 카이사르를, 카이사르는 알렉산더를, 알렉산더는 신화 속 헤라클레스를 부러워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비교의 사다리에는 언제나 자신보다 위에 있는 누군가가 존재한다. 그 끝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인 모습에 이를 수도 있다.
C. S. 루이스 역시 교만의 핵심에 비교가 있다고 설명했다. 사람들은 부유하고 똑똑하며 매력적이라는 사실 자체보다 다른 사람보다 더 부유하고 똑똑하며 매력적이라는 사실에서 우월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시기심은 이러한 비교가 반대로 작용하는 모습이다. 교만이 남보다 앞선다는 데서 만족을 얻는다면, 시기심은 뒤처진다는 생각 때문에 괴로워한다.
둘 다 삶의 좋은 것들을 순위와 서열의 문제로 바꾼다. 비교는 커진 욕망을 만족시키기보다 계속 키운다. 그렇다면 시기심이 자신을 부족한 사람이라고 속삭일 때 어떤 진리로 응답할 수 있는가.
시기심을 숨기지 않고 하나님께 가져갈 수 있다
시편 73편은 이러한 싸움을 정직하게 다룬다. 아삽은 자신이 시기심에서 자유로운 사람인 것처럼 말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께서 마음이 정결한 사람에게 선을 행하신다는 고백으로 시작하면서도, 자신이 거의 넘어질 뻔했다고 인정한다.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사람들을 질투했기 때문이다(시 73:1~3).
아삽은 그들의 안락함과 자신감, 고난에서 벗어난 듯한 모습을 바라봤다. 그들의 번영을 관찰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기준으로 자신의 삶을 판단했다. 그 비교는 그의 믿음과 마음을 흔들었다.
그는 당시의 상태를 돌아보며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양심이 찔렸나이다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시 73:21~22)라고 고백한다. 전환점은 그 문제를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가져갔을 때 찾아왔다.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시 73:16~17).
상황이 즉시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아삽은 다른 사람과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시각을 새롭게 했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시 73:25~26).
이 고백은 실망과 쇠약함이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다. 그 가운데서도 삶의 의미와 영혼의 안식이 어디에 있는지 다시 발견했다는 뜻이다. 우리도 시기심을 감추거나 그 감정 때문에 자신을 정죄하는 데 머무르기보다,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드러낼 수 있다.
하나님께서 나의 분깃이 되신다
‘분깃’이라는 말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히브리어 ‘헬레크’는 몫이나 할당된 부분을 뜻한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는 가족과 지파에게 주어진 기업을 떠올리게 하는 말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와 몫을 가리킨다.
가나안 땅이 지파들에게 분배될 때 레위 지파는 다른 지파와 같은 방식으로 영토를 받지 않았다. 하나님은 아론에게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땅에 기업도 없겠고 그들 중에 아무 분깃도 없을 것이나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네 분깃이요 네 기업이니라”(민 18:20)고 말씀하셨다.
레위인들은 다른 지파의 들판과 포도원을 바라보며 자신에게 없는 것을 의식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이 그들의 분깃이자 기업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의 몫은 다른 지파의 소유와 같은 기준으로만 평가할 수 없었다.
역대상 15장 16~17절에 따르면 아삽은 이스라엘의 예배를 섬기도록 세워진 레위인이었다. 따라서 하나님을 자신의 분깃으로 고백하는 말에는 그의 신앙과 정체성이 담겨 있다. 자신의 자리는 다른 사람을 이기거나 더 많이 소유하고 더 주목받는 데 달려 있지 않다는 고백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분깃이시라면 다른 사람의 아름다움과 부, 결혼생활과 영향력, 성취가 우리에게 주어진 몫을 줄이지 못한다. 타인의 성공을 자신의 상실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의 가치는 경쟁의 결과로 결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소속과 미래는 흔들리지 않는다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인의 깊은 위로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자신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몸과 영혼 모두 신실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고 답한다.
이어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로 죄의 값을 치르시고 마귀의 권세에서 해방하셨으며, 아버지의 뜻 안에서 보호하신다고 고백한다. 또한 성령께서 영생을 확신하게 하시고 기꺼이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가도록 하신다고 설명한다. 위로의 근거는 자신이 얼마나 뛰어난 사람인가에 있지 않다. 누구에게 속해 있는가에 있다.
복음은 실망과 상실의 아픔을 부정하지 않는다. 대신 상황보다 오래가는 확신을 준다. 성과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 사랑, 다른 사람이 앞서가도 사라지지 않는 소속감, 자신의 능력보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기초한 미래다.
그러므로 시기심이 부족함을 말할 때 다음과 같이 응답할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가장 빛나는 순간에도, 실패한 순간에도 변함없이 사랑받는다. 뒤처진다고 느낄 때에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미래는 다른 사람의 성취 때문에 줄어들지 않는다.
이는 현재의 필요나 어려움을 무시하라는 뜻이 아니다. 삶에 부족한 것이 있다는 사실과 자신이 사랑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는 판단을 구별하라는 뜻이다. 그리스도께서 함께하시고 우리를 위하신다는 사실은 비교로 얻을 수 없는 기쁨과 안식의 근거가 된다.
다른 사람의 복을 자신의 손해로 여기지 않아도 된다
비교하려는 마음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은혜 안에서 그 마음을 더 빨리 알아차리고 다르게 반응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뒤처지거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느낄 때 잠시 멈추고 물어볼 수 있다. ‘지금 무엇이 있어야만 내 삶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가.’
어떤 성취가 필요한가. 누구의 인정을 받아야 하는가. 어떤 소유나 관계, 어느 정도의 영향력이 있어야 자신을 괜찮은 사람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러한 기대를 구체적으로 알아차리면 그 안에 담긴 잘못된 믿음을 진리로 돌아볼 수 있다.
필자가 깊은 불만에 빠져 있던 시절, 한 멘토는 자신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말을 듣기만 하지 말고 자신에게 진리를 말하는 습관을 들이라고 권했다. 필자도 이 조언을 실천하기를 권한다. 비교가 자신을 부당하게 빼앗긴 사람처럼 느끼게 할 때, 그 생각에 그대로 끌려가기보다 말씀으로 응답하는 것이다.
필요하다면 아삽의 고백을 소리 내어 읽어도 좋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분깃이심을 기억할 때, 다른 사람의 삶을 자신의 가치를 판단하는 잣대로 삼지 않을 수 있다.
예수님의 팔복도 복에 관한 기준을 새롭게 한다.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과 애통하는 사람, 의를 위해 박해받는 사람이 복되다고 말씀하셨다(마 5:3~4, 10). 복은 눈에 보이는 성공과 안락함만으로 판단할 수 없다. 부러워할 만한 상황이 아니더라도 하나님의 은혜와 돌보심 아래 있는 삶은 복되다.
반대로 예수님은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어려움을 경고하셨다(마 19:24). 물질적 풍요가 곧 영적 안전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는 겉으로 드러난 형편만으로 다른 사람의 삶이나 자신의 삶을 성급하게 평가할 수 없다.
이러한 은혜는 다른 사람의 복을 진심으로 기뻐할 자유를 준다. 그들의 번영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잊거나 부당하게 대하셨다는 증거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사랑과 약속을 신뢰한다면, 다른 사람의 삶에서 이루어지는 좋은 일을 자신의 손해로 받아들이지 않아도 된다.
비교는 끊임없이 옆을 바라보며 충분히 가졌는지, 충분히 인정받는지 확인하게 한다. 그러나 복음은 하나님께 시선을 돌리게 한다. 그분께서 주시는 가장 큰 선물은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을 분깃으로 삼을 때 우리는 남보다 나아 보이는 삶을 좇는 데서 벗어나, 실제로 주어진 삶을 받아들이고 살아갈 자유를 얻는다. 그리고 다윗의 고백을 자신의 고백으로 삼을 수 있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시 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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