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진호 감독의 영화 ‘암살자(들)’이 추석 연휴 기간 140만여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한 가운데, 영화가 소재로 삼은 1974년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의 역사적 사실과 당시 제기된 여러 의혹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영화는 실제 사건에 영화적 상상력을 더한 작품이라고 제작진이 밝힌 반면, 정치권 일각에서는 역사 왜곡이라는 비판도 제기됐다.
1974년 8월 15일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는 제29주년 광복절 기념식이 열렸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경축사를 낭독하던 중 객석에 있던 재일교포 2세 문세광이 권총을 꺼내 박 대통령을 향해 총을 발사했다.
문세광은 현장에서 여러 발을 발사했고 박 대통령은 연단 뒤로 몸을 피했다. 이 과정에서 육영수 여사와 행사에 참석했던 장봉화 양이 총탄에 맞아 숨졌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 사건을 ‘8·15저격사건’ 또는 ‘박정희 저격미수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다.
문세광 사형…당시 정부는 조총련 배후 지목
당시 한국 정부는 사건 배후에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와 산하 조직 등이 있다고 판단했다.
문세광은 사건 발생 9일 뒤인 8월 24일 반공법과 국가보안법, 내란목적살인, 살인미수 등 13개 혐의로 검찰에 송치됐다. 이후 내란목적살인과 국가보안법 위반 등 6개 혐의로 기소됐다.
1심 재판부는 문세광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항소심에서도 원심이 유지됐다. 대법원은 같은 해 12월 17일 상고를 기각해 사형을 확정했다.
문세광에 대한 사형은 사건 발생 127일 만인 12월 20일 오전 집행됐다.
하지만 사건의 배후와 총격 과정 등을 둘러싼 의문은 이후에도 계속 제기됐다.
배후·총탄 경위 둘러싼 의혹 계속
육영수 여사가 맞은 총탄이 누구의 총에서 발사됐는지, 문세광이 실제 몇 발을 쐈는지, 또 다른 저격수가 있었는지, 비표 없이 행사장에 어떻게 들어갈 수 있었는지 등 여러 의문이 제기돼 왔다.
한국과 일본의 수사 결과에도 차이가 있었다. 한국 측은 조총련 등의 배후를 지목했지만 일본 측은 문세광이 김대중 납치사건에 분개해 박정희 정권을 무너뜨릴 목적으로 단독 범행을 저질렀다는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일본 측은 북한 배후를 입증할 증거도 찾지 못했다고 밝혔다.
당시에는 박정희 정권이 김대중 납치사건 등으로 정치적 수세에 몰린 상황에서 사건을 이용했거나 자작극을 벌였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다만 이 같은 의혹이 역사적으로 확정된 사실로 규명된 것은 아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역시 사건의 상세한 진상이 현재까지 완전히 규명되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영화 ‘암살자(들)’은 육영수 여사의 피격과 관련해 경호원의 총탄 가능성이나 당시 정권이 사건에 개입했을 가능성 등을 극적 가설로 제시했다. 영화는 배후를 명확하게 단정하지 않았지만, 이러한 설정을 두고 보수 정치권과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등에서는 역사 왜곡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제작진은 특정 정치적 목적이나 결론을 전제로 만든 작품이 아니라 당시 사건과 관련한 여러 기록에 영화적 상상력을 더한 극영화라고 밝혔다.
1년 전 김대중 납치사건…유신체제와 맞물린 정국
8·15저격사건이 발생하기 약 1년 전인 1973년 8월 8일에는 일본 도쿄의 호텔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김 전 대통령은 당시 야당 지도자로 해외에서 유신체제 반대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이후 이 사건을 둘러싸고 한국 중앙정보부 개입 의혹이 제기되면서 한일 관계뿐 아니라 한미 관계에도 파장이 이어졌다.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2007년 조사 결과를 통해 김대중 납치사건이 당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지시로 실행됐으며, 박정희 대통령의 직접 지시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고 최소한 묵시적 승인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다만 직접 지시 여부를 확인할 결정적 자료는 발견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당시는 1972년 유신헌법이 발효된 이후 박정희 정부가 정치적 반대 움직임을 강하게 통제하던 시기였다. 민주화운동이 확산하자 정부는 1974년 긴급조치 1호부터 4호까지를 잇달아 발령했다.
김대중 납치사건과 8·15저격사건이 직접적인 인과관계로 연결됐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두 사건은 당시 유신체제와 한일 관계, 국내 정치 상황을 이해하는 주요 사건으로 함께 거론돼 왔다.
피격 이후 한일관계 악화…유신체제에도 영향
8·15저격사건 이후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급속히 냉각됐다. 문세광의 범행 배후를 둘러싼 양국의 수사 결과가 달랐고, 한국 정부는 일본 측에 강력한 대응을 요구했다.
같은 해 9월에는 광복회원들로 구성된 시위대가 주한일본대사관에 난입해 기물을 파손하는 사건까지 발생하면서 양국 간 갈등이 심화됐다.
박정희 정부는 육영수 여사 피격 이후 반공 기조와 국민총화를 강조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당시 정부가 사건을 계기로 반공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고 유신체제를 공고화할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후에도 유신체제에 대한 비판과 민주화 요구는 이어졌다.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은 대통령 암살 미수와 영부인 사망이라는 비극적 사건에 그치지 않고, 한일 관계와 유신체제, 당시 국내외 정치 상황에 적지 않은 파장을 미쳤다.
영화 ‘암살자(들)’을 계기로 50여 년 전 사건이 다시 주목받으면서, 확인된 역사적 사실과 당시부터 이어진 의혹, 그리고 영화적 해석을 어디까지 구분해 바라볼 것인지에 대한 논쟁도 함께 이어지고 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