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우 목사
이희우 목사

근래에 드라마나 영화에서 기독교를 지나치게 희화화하면서 기독교에 대한 적대감이 고조되고 있다. 기독교에 대한 이미지는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부정적인 추세이고, 비난도 점점 더 노골적이다.

그런데 성전에서의 첫 번째 대화(Dialog)의 핵심이 “하늘로부터 온 교훈”이 되자 난리가 났었다. 무엇을 어떤 제목으로 가르치셨는지는 요한이 밝히지는 않았지만 예수님이 성전에서 “하늘로부터 온 교훈”이라며 가르치시자 군중들이 술렁대고 성전경찰까지 출동했었다. 두 부류로 갈렸는데 일부는 호감을 갖고 일부는 펄쩍 뛰었었다. 본문은 성전에서의 두 번째 대화(Dialog), “그리스도가 아니냐?”라는 제목이 적합할 것 같다.

이정표가 되신다

아주 오래된 노래지만 나훈아 씨의 ‘이정표 없는 거리’라는 노래가 있다. “이리 가면 고향이요 저리 가면 타향인데/ 이정표 없는 거리 헤매 도는 삼거리 길/ 이리 갈까 저리 갈까 차라리 돌아갈까/ 세 갈래 길 삼거리에 비가 내린다”

이 노래에서는 “이리 갈까 저리 갈까 차라리 돌아갈까? 세 갈래 길 삼거리에 비가 내린다” “와도 그만 가도 그만 반겨줄 사람 없고/ 세 갈래 길 삼거리에 해가 저문다”며 갈 곳을 몰라 헤매는데 비가 내리고, 갈 곳을 몰라 헤매는 데 날이 저문다고 했다. 좀 처량하지 않나? 그러면 인생이 너무 피곤하고 힘들지 않겠나?

인생은 길 위에 있다. 성경도 "인생을 거류민과 나그네"(벧전 2:11)라 했다. 아브라함도 야곱도 ‘나그네’, 그래서 인생의 이정표가 필요하다는 것이 말씀의 주제다. 문제는 이정표가 없으면 방향도 모르고 목적지도 어딘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이 답을 찾으려는 노력이 철학이요 종교일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이걸 알려고 숱한 사람들이 길을 나섰지만 속 시원한 답을 찾지 못했다. 생로병사의 고통도, 이별과 인생에서 만나는 고난도 어떤 뜻이 있다는 정도를 깨닫기는 한다. 또 아무리 재산을 쌓고, 명예를 쌓아도 자기가 머물러야 할 곳이 이곳이 아니라는 것도 깨닫는다. 하지만 노래 가사 그대로 이리 갈까 저리 갈까 차라리 돌아갈까 그런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르시다. 자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아신다.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라”(29절)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33절).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위해서 사는지,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분명히 아신다. 14:6절에서는 아예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곧 길이요”(I am the way), 당신이 바로 그 길이라 하셨다. 그래서 이정표가 되신다. 세상 네비게이션은 업그레이드를 해야 하지만 예수라는 이정표(또는 네비게이션)는 업그레이드가 필요없다. 완전하고 종국적이시기 때문이다.

『길에게 길을 묻다』라는 책이 있다. 길의 역사 철학 문화를 담은 한국 대표 길쟁이 16명의 길 에세이다. 서명숙이라는 분은 ‘사람을 살리는 길, 치유의 길’을 소개했고, 박수자 님은 ‘길은 마음의 병 처방전’이라 했다. 모 방송 음악프로그램 제목도 ‘길에게 길을 묻다’인데 본문 말씀에 적합한 표현이다. 최희준 님이 ‘인생은 나그네 길’이라 노래했듯이 우리 인생은 자주 길에 비유된다. 출발지와 목적지를 잘 모르기에 필요한 이정표, 사실은 이정표 정도가 아니라 길에게 길을 물어야 한다. 책 제목이나 음악 프로그램 제목과 의미는 다르지만 예수님이 길이시다. 우리에게 이정표를 제시해주실 뿐만 아니라 어디가 목표이고, 어디가 안전하며, 어떻게 위험한 길을 피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주고 친히 동행해 주시는 분, 그래서 ‘길에게 길을 묻다’를 ‘예수님께 길을 묻다’로 생각하면 좋겠다.

인생을 길에 비유하는 건 동서양이 따로 없다, 한자로 인생을 표현하는 ‘날 생’(生)자는 외나무 다리(一) 위에 소(牛)가 걸어가는 모습, 그만큼 위태롭다는 뜻이다. 가는 길이 아슬아슬하다. 지름길로 생각했는데 위험한 길이고, 험한 길로 생각했는데 그 길이 더 안전하고 빠른 길이기도 하다. 안개 속을 헤매며 길을 가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라면 북극성이라는 목표나 기준점은 볼 줄 알아야 하듯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그래야 길을 제대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생을 순례길에 비유한 최고의 작품은 단연 존 번연의 『천로역정』이다. 감옥에서 쓴 책, 번연은 1660년 영국 국교와 일치하지 않는 예배를 집행한 죄로 기소됐다. 성공회가 아닌 침례교회에서 활동했기 때문이다. 투옥되었음에도 “같은 범죄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서약서에 서명을 하지 않아 무려 12년이나 감옥생활을 했다. 그 12년간의 감옥생활이 『천로역정』이라는 불후의 명작을 낳았다. 도스토예프스키도 오 헨리도 감옥에서 명작을 썼는데 『천로역정』도 옥중 소설이다. 크리스찬이라는 주인공은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이 땅이 장차 유황불에 심판당할 멸망의 도시임을 깨닫는다. 잠이 오지 않았다. 하루 종일 “어찌할꼬” 탄식한다. 가족들이나 이웃에게 말해도 비웃기만 한다. 그때 성경 속 인물들이 등장하여 멀리 보이는 좁은 문을 향하여 나아가라고 충동한다. 그 길이 영원한 도성으로 향한 길이다. 그렇다면 그 길이 살길, 그래서 크리스찬은 길을 나선다. 아내와 자식들이 그가 뛰어가는 것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라고 소리치지만 손가락으로 귀를 틀어막고 뛰어가면서 그는 ‘생명, 생명, 영원한 생명!’ 소리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평원 한가운데를 향해 달려간다.

물론 순례길에 많은 유혹과 위험이 있다. 그러나 친구와 동행자들의 도움을 받으며 결국 영원한 도성에 들어간다. 그래서 영화 천로역정의 명대사 중에 이런 말이 있다. “도움은 언제일지 모르지만 늘 곁에 있다.” 또 인상적인 장면은 힘들게 언덕을 올라가는데 그 정상에 십자가가 서 있는 것이다. 그 곳에 이르자 크리스찬의 등을 무겁게 내리누르던 짐이 벗겨진다. 얼마나 자유로웠을까? 여행에서 짐이 없을 때의 자유로움을 알지 않나? 주님께 돌아가야 한다.

사회 심리학자 에릭슨은 심리사회적 발달에 인생을 8단계로 구분하고 나이에 따른 해결 과제를 제시했는데 성인 말기, 즉 노년기에 해결해야 할 과제는 ‘통합’이라 했다. ‘절망’하기보다 화해하라는 말이다. 이 화해는 자기와의 화해, 그리고 타인과의 화해다. 화해가 곧 짐을 더는 것이고 벗는 것, 죽을 때 한이 없어야 한다. 화해하고 마음이 편하고 자유롭게 가야 한다.

어디서 오셨나?

그리스도의 기원에 대한 논란에서 빚어졌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잘 안다고, 그래서 예수님이 죽여야 할 그리스도는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스도는 신비적 인물이라 어디서 왔는지 아는 자가 없어야 하는데 예수는 갈릴리 나사렛 출신, 우리가 다 안다면 그는 그리스도는 아닌 것, 그래서 죽여야 할 이유는 없다고 말한 것이다. 레온 모리스는 이 사람들은 나름대로 예수님의 교훈과 설교에 호감을 갖게 된 사람들이라 했다.

그런데 요한복음 1장은 이미 예수님 탄생의 신비성을 깨고 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1:14), 진리가 고고한 것이나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육신에 있다는 것이다. 이 육신은 헬라어로 사륵스(σάρξ), 그냥 고깃덩어리다. 갈릴리 나사렛 땅에 사셨던 예수라는 한 인간에게서 로고스(λόγος)를 보았다는 것이 사도 요한의 증언이다. 추상이 아니라 실재(reality)라는 말이다.

요한복음은 마리아의 몸을 통한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에 대해서도 노 코멘트다. 흔히 비범한 인물은 탄생도 신비스러워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요한복음은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평범한 인간처럼 보이는 출생으로 다루면서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셨다고 증언한다. 요한일서에서는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1:1), 육체적으로 생생하게 경험한 분으로 강조한 것이다.

그런데 신비를 주장하는 무리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그들은 사실 그리스도를 기다리지 않는 사람들이다. 신비를 주장할수록 엘리트요 기득권일 가능성이 높은데 신비를 말함으로써 현재 역사적으로 일어나는 하나님의 은총 사건은 외면하는 것이다. 그저 진리를 먼 이상이나 관념으로 만들면서 자기 곁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은 외면한다.

다른 한 부류는 표적 신앙을 신뢰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표적이 많다는 것을 근거로 예수님이 그리스도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이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31절), 그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일 수 있다고 본 근거가 표적(sign-act), 그들은 메시아시라면 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힘을 쓰는 권력의 길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을 가신다. 요한복음 13장의 세족식은 권력과는 거리가 먼 섬김, 즉 반권력의 모범이다. 심지어 십자가의 수난을 오히려 영광의 때라 하신다. 힘을 가진 분이 아니라 힘을 포기한 분, 힘을 포기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높이고 믿는 자를 주체적으로 만드시는 분이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온유하고 겸손한 것을 약한 것으로 간주하고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호감을 가졌던 무리들도 표적 신앙에 매였기에 공생애 기간 동안 그렇게 열심히 따랐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수난당하는 약한 분이 되시자 그들은 다 예수를 버렸다.

한편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고 빨리 예수를 체포하려 한다. 재미있는 것은 주로 사두개파에 속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평소에는 원수지간인데 예수님을 죽이려는 공동의 목표로 의기투합한다는 것이다. 해괴한 일이다. 원래 대제사장들은 로마 정부와 결탁하여 현세 기복적으로 사는 정치꾼들이고, 바리새인들은 나름대로 이스라엘의 신앙을 꼿꼿하게 지킨다는 자부심으로 사는 철저한 종교인들, 그들은 정치꾼인 사두개인들을 업신여겼다. 그런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된다고, 그들이 하나가 되어 불법도 서슴없이 행하는 비열하고 악한 사람들이 되고 말았다. 모처럼 하나가 된 그들은 이 좋은 기회에 예수를 잡으려고 성전 경찰들(아랫사람들)까지 보낸다. 다행히 군중들의 분위기에 눌려 경찰들은 감히 손을 대지 못했다.

어디로 가신다고?

사람들은 고정관념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육신의 세계에만 갇혀 있다. 예수님은 나를 찾아도 만나지도 오지도 못할 것이라 하신다. 유대인들은 당황했다. ‘해외로 가시나?’ ‘헬라인들에게 가시나?’ 의아해한다. 제자들도 마찬가지, 14장에서 예수님이 떠난다고 하실 때 도마가 묻는다.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14:5), 어디로 가시는지를 몰랐던 것이다.

예수님은 분명히 아버지께로, 아버지 집으로 간다고 말씀하시지만 제자들은 그곳이 어디인지를 모른다. 물질 세계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세계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그곳이 천국임을 안다. 인생은 잠깐의 소풍이고 스쳐가는 여행길이라는 것이 신약 성경의 일관된 증언, 모든 인생이 가야 할 곳이다.

그렇지만 예나 지금이나 천국은 가깝고도 먼 곳. 유대 백성들은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 감이 없다. 아마 중세 시대가 영원한 세계를 가장 리얼하게 느꼈던 시기였던 것 같다. 전쟁, 질병과 역병, 빈곤으로 인해 인간의 수명이 짧았기 때문에 죽음 이후의 세계가 현실적인 관심사였던 것이다.

그런데 현대 사회는 과학의 발달과 풍요와 안전으로 인해 영원한 세계에 대한 동경이 사라졌다. 신자들마저 내세 신앙을 잘 믿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내세 신앙은 기독교의 핵심 가치 중 하나다. 이 내세 신앙 때문에 이 땅의 욕망과 권력 추구를 어리석게 여기고, 불의를 행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정의와 사랑을 염두에 두며 사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는 죽게 될 것이다. 그래서 실존철학에서는 인간을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고 있는 존재’로 규정한다. 사망은 인간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 누구도 피할 수 없다. 오는 데에는 순서가 있지만 가는 데에는 순서도 없다. 그래서 부활 신앙이 중요하다. 만일 부활 신앙이 없다면 죽음이 불편하고, 두려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죽음이 끝이 아니다. 성경은 죽음 이후의 세계가 있다고 한다. 그것도 영원한 세계다. 그리고 그곳에 예수님이 계신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와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 돌아가겠노라”(33절)며 원수들의 음모에 전혀 개의치 않고 그들이 알아듣기 힘든 좀 아리송한 죽음을 말씀하셨지만 군중들의 관심은 “그가 그리스도가 아니냐?”였다. 믿으라.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우리 주님이시다.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 권세로 우리는 승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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