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펜젤러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전 기감 교육국 총무 김낙환 목사(D.Min)
아펜젤러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전 기감 교육국 총무 김낙환 목사(D.Min)

4. 우남과 배재학당(培材學堂)

가. 선교사들로 구성된 배재학당의 교사진

배재의 제일 큰 장점은 아마도 우수한 교사진이었을 것이다. 초대 당장인 선교사 아펜젤러의 경우 그는 미국 펜실베니아의 명문 프랭클린 앤 마샬 대학(Franklin and marshall College)과 드류 신학대학교(Drew Theological Seminary)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자마자 한국을 찾아온 젊고, 기상이 넘치며 실력 있는 이상주의적 선교사였다. 우남에게 영어를 처음 가르쳐 준 노블(William A. Novel) 목사와 존스(George H. Jones), 벙커(Dalziell A. Bubker)등 다른 선교사들 역시 아펜젤러 못지않은 학력과 사명감을 지닌 빼어난 교사들이었다. 또 다른 배재 교사로는 「조선휘보」를 창간한 벙커(Rev. D.A. Bunker)와 올링거 박사도 있었고, 「삼문 출판사」를 경영하고 후일 한국문화의 소개인으로 가장 유명해진 헐버트(Homer. B. Hurbet)박사 등이 있었다.

당시 배재학당에는 이들 미국인 교사 이외에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미국에서 고등학교와 의학교육을 마치고 의사가 되어 미국시민으로서 귀국한 갑신정변 당시(1844)의 개혁정치가 서재필이 일주일에 한 번씩 강사로 드나들면서 세계 역사와 지리, 그리고 민주주의와 국제정세 등에 대한 특강을 하고 있었다.

또한 비슷한 처지의 개화파 인사인 윤치호(1865-1945)가 있었다. 당시 윤치호는 이미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기독교로 개종하여 미국으로 건너가 밴더빌트(Vanderbilt University)대학을 마치고 에모리(Emory University) 대학에서 5년간 머무르며 신학과 영어 그리고 인문 사회학을 공부하여 돌아와 배재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인사였다. 한마디로 우남이 입학했을 무렵 배재학당이라고 불리었던 이 학교의 교사진은 요즈음 한국의 일류대학 인문과 교수진 이상으로 우수했던 것이다.

우남의 정치 고문이었던 로버트 올리버(R. Oliver)박사는『대한민국 건국 대통령 이승만』에서 당시 교사들 가운데 노블과 아펜젤러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배재학당에서 만난 이승만의 첫 스승은 노블 박사였는데 승만 학생 반에서 가르친 첫 영어 문장은 “아버지는 그에게 배재학당에 가서 화학 공부를 하라”는 것 이었다. 수년이 지난 후 1912년, 이승만이 미애나 폴리스에서 개최된 국제 감리교 대회에 참석하여 그 곳에서 노블 박사를 만났을 때에 학생들에게 왜 그렇게 통상적이지 않는 문장을 갖고 학습을 시작하고서 어떤 결실이 있는지에 대하여 질문하였다. “내가 바로 그때 화학과목을 맡게 되었고 학생들을 모을 욕심으로...라고 대답하였다.” 그 스승으로부터 우남은 영어 철자법에서부터 고매한 인격, 인내심을 배웠으며 일생동안 그에 대한 존경심을 간직하였다. 노블 박사의 아들 헤롤드는 이승만의 일생에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1948년 (대한민국 수립시)에는 마지막 단계에서는 늘 좋은 결실을 보였지만 외교문제에 한해서는 뒤범벅이 되어 좋지 못한 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배재학당의 초대 교장인 헨리 아펜젤러는 대단히 정력적인 분으로서 담당분야를 직접 가르치는 것을 추가해서 「조선휘보」(Korean Repository)의 편집을 도왔는데 학당 부설 감리교 출판사의 월간지인 동지는 당시의 가장 중요한 정보원의 기능을 하였다. 아펜젤러는 학생들이 직접 교내 신문을 제작함으로서 영어 학습에 도움이 되도록 독려하였고 이승만이 편집자 대표를 맡게 되었다. 아펜젤러는 신문에 전제될 모든 주제를 편집하였는데 이것은 올바른 영문 정정과 학교 운영에 어려움을 줄 수도 있는 내용의 사전 검열을 위한 것이었다. 또 다른 배재 학당의 교사로는 조선 휘보를 창간한 벙커와 올링거 박사도 있었고 삼문 출판사를 경영하고 후일 한국 문호의 소개인으로 가장 유명해진 호머 박사 등이 있었다."(로버트 올리버, 『대한민국 건국대통령 이승만』, p. 32-33.)

우남의 진보적인 사상과 활동적인 지성 그리고 영어로 말하고 글을 쓰는 등 자신의 표현에 대한 강열한 흥미 등으로 인해 이들 선교사 선생들과 교우를 다지게 되었고, 그들과 수많은 시간을 같이 함으로 인해 우남의 사상은 서서히 그들의 영향을 받아서 서구적으로 변하여 갔던 것이다. 우남은 이들 교사들의 영향으로 인해 점차 미국의 이상적인 아이디어와 만인은 동등한 권리와 기회를 갖는다는 이론을 배우게 되었고 조선의 정치, 사회구조는 점점 견디기 힘든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계속>

※일부 각주는 지면상 생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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