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칠곤 목사(미국 크로스로드 한인교회)

[기독일보] 어린 시절, 그리 놀 거리가 많지 아니한 한 여름의 불볕더위 아래 동네 아이들과 어우러져 운동하던 때가 가끔씩 생각이 난다. 마을에 빈 공터가 하나 있으면, 그곳에서 축구공 하나와 돌을 가지고 양쪽에 축구 골대를 만들어 놓고 서너 명이 공을 차기 시작한다. 그러면 어디서 오는지 동네 친구들과 형들이 어김없이 찾아온다. 경기를 할 만한 인원이 모이면 서로의 팀을 위해 땀이 비오듯 흘러내려도 누구하나 경기를 하는 것에 대해 실증을 내지 않는다. 오늘날 아이들을 보고 옛날 어린 시절처럼 운동장에서 뛰며 놀라고 한다면 아마도 그 아이들은 축구 보다 더 재미있는 게임이 집 안에 많은데 굳이 더운데서 힘들게 공을 차느냐고 불평을 할 것이다.

신나게 경기를 하고 전반전이나 후반전이 끝나면 땀을 너무나 많이 흘렸기에, 마땅히 먹을 음료수도 없던 그 시절에 유일하게 먹을 수 있는 물을 찾기 위해 동네 우물가로 모두가 뛰어간다. 그리고 깊은 샘 가운데 놓여 있는 두레를 올려 당겨 너, 나 할 것 없이 서로가 두레박에 담긴 물을 먹는데 모두가 거침없이 물을 들이 마신다. 어떤 친구들은 자신의 티셔츠가 젖는지도 모르게 물을 꿀꺽꿀꺽 들어 마신다. 물을 먹는 것이 너무나 시원하고 갈증 난 것을 완벽하게 해결해 준다. 모두가 갈증이 풀린 것 같아 바로 빈 공터로 돌아갈 것 같지만 물을 마신 후에도 잠시 동네 우물가에 앉아 있는 친구들도 있다. 그런 경우는 다시 한 번 시원한 우물물을 마시기 위한 것이며 조금이라도 처마 밑에 쉬기를 바라는 마음에 의한 것이다.

인간의 몸에 수분이 70%나 차지하고 있기에 인간의 삶에 물은 없어서는 안 될 너무나도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기에 물은 인간이 살아가는데 항상 가까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사람이나 모든 자연과 동물들은 물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을 뿐 아니라 땅도 메말라서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인간은 항상 그리고 끊임없이 갈증 난 것을 채워야 하는데 그것이 곧 물이다. 이 천년 전에 인류의 죄인 된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내려놓으시고 인간의 옷을 입고 사람과 동일한 모습을 가지고 삶을 살아가셨다.

그런 예수님께서 어느 날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는 중에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가게 되었다. 거기에 마침 야곱의 우물이 있었다. 길을 가시던 예수님은 가장 뜨거운 낮 시간인 정오에 피곤하시기도 하고 갈증이 나셔서 우물에 갔다. 그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무시하고 박해하는 사마리아의 한 여인이 물을 길으러 왔었고, 그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물을 조금 달라고 하셨다. 사마리아인에게 유대인이 물이 필요하여 부탁을 한다는 것이 너무나도 신기하고 귀하게 여긴 여인은 예수님이 누구인가에 대해 궁금함을 가지게 되었다. 그가 고민하는 중에 예수님께서 나는 '생수'이다 라고 말씀하셨고 그 생수가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하셨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한복음 4:14) 이것은 영생에 관한 것이며, 죄인 된 인간이 구원을 받아 죄에서 해방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한 것은 '나를 믿고 나를 따르고 나로 부터 구원함을 받은 자는 영원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예수를 모르는 사람이 예수를 믿고 구원함을 받음으로 인해 삶의 행복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자녀 된 행복은 세상이 주는 가치와는 차원이 다른 축복된 것이다.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의 가치는 일반적으로 돈, 명예, 권력이다. 이것을 위해 사람들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삶이 아니라 자신이 욕구 충족을 위해 그리고 더 많이 가지기 위해 연약한 인간을 큰 산으로 여겨 인간을 벽으로 삼고 살아간다. 인간은 절대적으로 사람들이 믿고 따르기에 너무나 죄악 되고 자신에 이익의 관계에 손실이 주어질 것 같으면 가차 없이 누군가를 버리는 불완전한 존재이다. 그 이유는 인간은 하나님이 만드신 빛과 어둠, 공기와 물, 식물, 해와 달과 그리고 별들, 공중의 새들, 기어 다니는 모든 벌레들과 짐승들 다음으로 만들어진 하나님이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누군가가 나를 위해 존재할 것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간다. 그러기에 상처를 받고 상처를 주고 그것으로 인해 좌절과 절망에 빠지는 삶을 살아간다. 돈, 명예, 권력이 나의 삶을 보다 더 낫게 하고 행복을 줄 수 있다고, 그것들에 너무나 의존하여 결국 죄의 늪에 빠져 어두움에 살아가는 사람들도 너무나 많다. 그것이 삶의 행복을 산산 조각 나게 한다. "조각난 행복"이란 시의 한 부분을 보면 "일렁이는 행복을 온 몸으로 껴안으려 해도 미동도 없는 바람 곁에 산산이 부서지고, 산산이 부서져 조각난 행복인데 행복은 왜 이다지 무겁고 힘이 드는가."

인생의 삶에 조각이 난다는 것은 삶의 중심에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이며 그 속에 성령의 능력이 아니라 인간의 생각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세상적으로 추구하려고 하는 가치와 행복이 하나님이 없는 것이라면 그곳에는 결코 행복을 찾을 수 없다. 오늘날 인간들이 살아가는 삶을 혹자는 조선시대에 사형제도의 하나인 소들을 통해 사지를 찢어 죽이는 능지처참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표현한다. 그 이유는 사람들의 삶이 뭔가에 너무나 바쁘게 몰입되어 살아갈 뿐 아니라 진리가 아닌 것에 유혹이 되어 그것이 진리와 행복인 것처럼 살아간다. 마치 세상의 마약, 도박, 컴퓨터 게임, 스포츠 그리고 SNS에 미혹되어 자신의 삶이 갈기갈기 조각이 난 삶을 살아가는 것과 같다. 이 내면에 중심에는 돈이고 그것이 사람들을 정상적이 아닌 삶을 살아가게 한다. 결국 돈이 인간의 삶을 움켜쥐고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빛의 삶을 살아가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이러한 삶을 살아가면 살아 갈수록 삶에 영적인 갈등은 더욱더 심해지고 가정은 더욱더 파괴되어 간다. 그 이유는 삶에 하나님이 없기에 기쁨도 즐거움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진리의 하나님을 따르기 보다는 자신과 유희를 위해 살아가도록 길을 제시한다. 그곳에는 생명이 없기에 그 어느 누구에게도 기쁨의 삶을 살 수 없다. 영원한 생명과 진리이신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한 사람은 성령에 의한 삶을 살아가기에 좌절과 절망에 빠진 사람을 위로하며 사랑할 수 있다. 이것을 주시는 분이 나의 죄를 구원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주님은 갈증 난 사람에게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인간은 각자의 삶을 살아가도록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맞는 양동이를 주셨다. 이곳에 채워 넣어야 할 것은 세상의 가치가 아니라 성령으로 가득 채우는 삶을 살아야 한다. 오직 성령님만이 나의 삶을 빛 된 삶을 살도록 하시며 행복을 주시기 때문이다.

글ㅣ크로스로드 한인교회 김칠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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