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수 목사(기장 총회교육원)   ©한국기독교장로회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되었다는 것은,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분처럼 살고 있기에 우리가 심판 날에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에서 드러납니다. - 요한1서 4:16!17(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주석성경) -

요한의 서신에는 집필 동기나 필자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습니다만, 본문을 잘 살펴보면 요한 서신을 받는 이들의 상황이나 서신을 쓰게 된 이유는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우선, "그리스도의 적"(1요 2:18, 22, 4:3, 2요한 7), "거짓 예언자"(1요한 4:1), "거짓말쟁이"(1요한 2:22), "속이는 자"(2요한 7) 등의 단어들은 서신을 받는 공동체가 최근 심각한 위기상황을 겪었음을 추론하게 합니다. 이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공동체의 일원(1요한 4:5)이었으나, 영지주의라는 이단 사설에 빠져 이단 사설을 퍼뜨려 신자들을 탈선시키려고 애를 씁니다.

영지주의는 다양한 문제가 있었지만, 자기들은 죄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형제를 사랑하는 일에 전혀 마음을 쓰지 않습니다(1요한2:9). 요한1서가 영지주의를 명백하게 반대하고 있음은 1장의 서두에서 알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있었으며, 우리가 들었고, 눈으로 보았으며, 우리가 손으로 만져 본 것, 즉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곧 '생명의 말씀'이라는 선언입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 인간과 다르지 않았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입니다.

요즘 개인적으로 지속해서 신학적인 혹은 신앙적인 정립을 위해 고민하는 주제가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존재하는 방식이시며, 이 세상을 창조해 가시는 방식입니다. 그 사랑을 어떻게 나타내고 계시는 것일까? 그 사랑의 하나님을 우리는 어떻게 만날 것인가? 이런 고민입니다. 그런 과정에서 '하나님의 사랑방식'에 대해 정리한 것들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사랑방식은 강압적인 것이 아니라 관계적입니다.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식의 삶을 망가뜨리는 지혜롭지 못한 부모는 얼마든지 많습니다. 그런 경우 대부분 '강압적인 사랑'입니다. 자식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들을 부모가 대신해줍니다. "사랑하기 때문에"라는 말로 모든 것이 정당화됩니다. 자녀의 입장이 아니라 부모로서, 부모의 역할을 다했다고 자위하기 위해서 사랑합니다. 그러다가 자녀가 실패하거나 부모가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하면 배신했다고 허탈해하고 심지어는 관계를 끊기도 합니다.

그러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방식은 다릅니다. 항상, 언제나, 영원히, 태초부터, 지금도 사랑하시지만, 강압적으로 사랑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강압적인 사랑이 아니라 관계적인 사랑입니다. 사랑하시지만, 그 사랑은 마법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관계적인 사랑이란 이런 것으로 생각합니다. '함께 있는 것'입니다. 요한1서 4장 15절에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고백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안에 머무시고 그 사람도 하나님 안에 머무릅니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방식은 '함께 있는 것, 그 사람 안에 머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녀가 실패하였을 때에 하나님은 저 하늘에서 바라보시는 것이 아니라 실패자로, 낙심하였을 때에는 낙심하는 자로, 고난을 겪을 때에는 고난자가 되어 함께 있는 것입니다. 세월호 참사로 사랑하던 자녀를 먼저 보내고 찢어지는 가슴을 부여잡고 우는 부모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부모가 되므로 함께 있는 것입니다. 함께 있지만, 바라보는 처지에서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가 되는 방식입니다.

강압적인 사랑이 너와 나라는 구분이 있다고 한다면, 관계적인 사랑은 네가 곧 나이기 때문에 구분이 없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사랑방식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머무르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에 어떤 사람이 하나님 안에 머무른다고 합니까?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이라 했습니다. 사랑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 안에는 누가 머무릅니까? 하나님이 머무십니다.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거한다, 머무른다"는 의미는 밖이 아니라 안을 의미하고, 머무른다고 하는 것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고 고백할 때, 그 사랑은 영원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 영원성은 그래서 어떻게 나타납니까?

그가 죄인일 때에도, 불의한 일을 할 때에도, 하나님의 사랑은 여전히 그에게 머무른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마음 같아서는 불의한 자들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는데, 확 쓸어버리셨으면 좋겠는데,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시고 기다리십니다.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실패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완벽한 사랑이 아니라 실패한 사랑, 실패했다고 여겨지는 그 순간에도 여전히 사랑하는 사랑, 그것이 완전한 사랑이 아닐까요?

요한1서 4장 20절 말씀에 "형제 사랑과 하나님 사랑"은 동떨어질 수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쟁이라는 것입니다. 그 '형제', 우리가 사랑해야 할 '형제'는 누구입니까?

조금 어려운 이야기지만, 측은지심을 느끼는 대상만이 아니라, 혈육 관계나 인간관계를 맺은 대상만이 아니라, 내가 미워하는 혹은 나를 미워하는 이들조차도 '형제'에 포함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타도의 대상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누구도 타도의 대상으로 삼고 미워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이 모든 피조물 속에 머무르신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인간만 혹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 속에만 하나님이 내재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사랑방식은 먼저 보여주시고 사시는 것입니다.

요한1서 4장 10절 말씀에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셔서 아드님을 속죄제물로 보내주셨다"고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실 때 직접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너희는 이렇게 살아라!"가 아니라 먼저 보여주시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말씀에도 "이 세상에서 그분처럼 살고 있기에 우리가 심판 날에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분처럼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요한서신에서 이 부분에 대해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분 안에 머무른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도 그리스도께서 살아가신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1요한 2:6)."

이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이 우리 안에, 내 안에 거하시며 일방적이고 강압적인 방식이 아니라 나의 응답을 기다리며 사랑이 완성되길 기다리시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 17절에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되었다는 것"이라는 말씀은 바로 사랑의 관계성에 비추어 보면 사랑의 최종적인 완성의 열쇠는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에게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무능하신 하나님이?

그런데 그게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우리가 해야 할 일들조차도 하나님께 미뤘습니다. 그 결과 완성되었어야 할 일들이 미완의 상태에 머물러 있었고, 어떤 일들은 실패했습니다. 그런 결과들이 오늘 우리가 현실에서 맞이하는 부조리한 것들입니다. 누구의 책임입니까? 하나님의 책임입니까? 인간의 책임입니까?

하나님은 지금도 이 세상을 사랑하십니다.

강압적으로 당신의 뜻을 이루시지 않고 지금도 여전히 당신이 사랑하시는 이들을 통해 사랑이 완성되길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방식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시는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글ㅣ김민수 목사(기장 총회교육원)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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