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선 소장   ©아시안 약물중독 치료서비스

1979년 10월 오클라호마의 조그만 타운에 위치한 브룩스의 농가에서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저녁식사를 준비하기 위해서 분주히 쇠고기를 손보고 있는 어머니 메릴린과 월요일 저녁에 방영되는 풋볼경기에 열광하는 아버지 리처드가 부엌과 리빙룸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메릴린은 신으로 부터 아름다운 목소리를 선물 받은 교회의 합창단원이었으며 아버지 리처드는 타운 내에서 존경받는 침례교의 젊은 전도사였다. 12세였던 그의 여동생 레슬리는 길을 잃었다며 두 남자가 접근해 올 때에 현관문을 열어주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 16세였던 브룩스는 마을의 자동차 액세서리 가게에서 시간제 근무를 마치고 막 집에 돌아왔을 즈음이었다.

두 남자는 전화를 걸자며 자연스럽게 집안으로 들어왔고 불과 몇 분도 채 안되어서 그들은 돌연 강도로 변신하며 브룩스의 전 가족을 결박했다. 뜻 하지 않았던 순간에 자유와 평화를 강탈당한 브룩스의 가족들은 얼마나 오랫동안인지도 모르는 지루한 시간 속에서 온갖 폭력과 린치에 시달리게 된다.

오클라호마 십대퀸으로 뽑히기도 했던 12세의 레슬리는 강도들의 성욕의 타깃이 되며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사람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성폭행을 겪게 된다. 두 강도는 그들의 욕정을 모두 채우고 난 후 집안에 있던 현금 단 43달러와 부모의 결혼반지를 손아귀에 쥔 체로 3.5구경 리볼버 권총의 여섯 발을 남김없이 아버지와 어머니 레슬리 그리고 브룩스를 향해서 차례차례 사격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몸에 무거운 통증을 느끼면서 의식을 회복한 브룩스는 이미 숨을 거둔 채 거동이 없는 어머니를 목격했고 피범벅이 되어 힘겹게 숨을 몰아쉬는 아버지를 발견하게 된다. 자신의 눈앞에서 죽어가는 부모님을 무기력하게 바라볼 뿐이었던 브룩스는 기적적으로 함께 살아난 동생 레슬리를 픽업트럭에 가까스로 태우고 전속력으로 인근병원을 향해 내 달렸다. 중환자실로 옮겨진 두 남매가 수술을 받고 의식을 회복할 때쯤에는 이미 부모님의 장례식이 마을 사람들에 의해서 치러지고 있을 때였다.

졸지에 엄청난 재앙을 만난 브룩스와 레슬리는 그 후 15년의 세월을 오직 사랑하는 부모의 생명을 유린한 그 두 명의 살인자들에 대한 분노와 복수의 일념으로 시간을 보낼 수밖에는 없었다.

그들의 삶은 당연히 순탄치 않았으며 삶을 바라다보는 영혼은 병들어 있었다. 브룩스는 살인자들의 인권을 옹호하는 듯 한 현행법에 불만을 느끼며 자신의 마을을 대표하는 주의원 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살인자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볼 수 있는 희생자 가족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법을 통과 시킨다.

마침내 브룩스는 그 법에 따라서 그의 부모를 죽인 살인범중 한명의 사형집행의 현장에서 그 마지막 순간을 지켜볼 수 있었다. 하지만 오랜 세월을 괴로워하며 분노 속에서 살아야 했던 그 찢겨진 영혼의 상처를 살인범의 목숨을 통해서 해결할 수는 없었다.

어느 날 브룩스는 남아있는 살인범과의 면담이 성사 되었을 때 충격을 받을 수밖에는 없었다. 15년을 한 결같이 그들의 죽음을 위해서 뛰어 다녔었는데 정작 살인범은 세상에서 가장 측은하고 비참한 모습으로 그에게 용서를 빌고 있었다. "나로 인해서 소중한 가족의 생명을 잃은 너에게 나는 영원한 죄인이다. 지금이라도 원래대로 되돌릴 수만 있다면 나는 어떤 형벌이라도 달게 받을 텐데... 그때는 내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 나 자신도 모르겠어. 미쳤던 거지."

자신의 삶을 망가뜨리고 그에게서 가족을 빼앗아간 그 살인범의 진솔한 뉘우침에 브룩스는 어쩌면 자신과 살인범은 기구한 운명을 함께 나누며 고통스럽게 살지는 않았는지 생각되었다. 그리곤 브룩스는 그 순간 그를 용서한다고 단언했다.

그때부터 브룩스의 가슴에 새로운 삶의 소망이 생겨나며 그의 인생은 긴 어둠의 터널을 빠져나와 밝은 햇살에 보석처럼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뒤늦게 케네디 스쿨에 진학한 브룩스는 극작가의 길을 준비했고 마침내 가족의 참극을 용서를 통해서 승리로 이끌어 간 그의 일대기 'Heaven's Rain'이 탄생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감동의 사건은 그 자신이 영화 속의 아버지 리처드의 역할을 재현했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결정에 대해서 브룩스는 말한다." 생전에 함께한 아버지의 모습을 나만큼 잘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는 내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내게 하고 싶었던 그 말을 알고 있으며 진실로 표현해보고 싶었다."

나는 브룩스의 인간승리를 바라다보며 내 안에 내재되어 있는 오랜 가슴의 상처가 해묵은 분노가 되어서 나를 방해하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감춰 둔 분노가 우리 삶의 장애물이 되어서 오늘 우리들의 삶에 얼마나 커다란 고통을 주고 있는가?

이민의 삶에서 우리는 많은 상처를 가지고 산다. 단지 문화적 차이로 인해서 빚어지는 부모와 자식 간의 몰이해와 불협화음은 얼마든지 부모 자식 간에 서로를 분노하게 하며 좌절 시키고 있는지. 하지만 영화가 보여주고 있듯이 조건 없는 관용과 용서는 극도의 불행까지도 극복하며 오히려 그것을 통해서 삶의 진리를 발견하게 되는 축복을 얻게 됨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영화가 세상에 개봉된 지 얼마 있지 않아서 그 중형의 살인범은 감옥에서 그의 삶을 마감한다. 마치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 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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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선소장 #용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