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삼 목사   ©서울광염교회

헤브론에 살던 아브라함이 그랄로 이사했습니다. 그랄은 블레셋 사람의 땅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기 전부터 가나안 땅에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랄에서 이전에 애굽으로 내려갔을 때처럼 또 아내를 누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믿은 블레셋 왕 아비멜렉은 사라를 아내로 취하려고 했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이 개입하심으로 사라는 위기에서 벗어났습니다. 애굽에서 아브라함이 한 것과 같아도 너무 같습니다.

'왜 아브라함은 이같이 잘못을 거듭 행하고 있을까. 혹시 아브라함은 이것을 잘 못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것을 잘못이라고 생각하기보다 오히려 그 일로 한 몫 잡았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직접 꾸짖지 않고 이전에 바로를 통해 꾸짖은 것을 하나님의 꾸짖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아닐까.'

아브라함이 같은 잘못을 반복하는 것을 보면서 여러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나 돌아보면 우리 역시 예외는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온 여정도 아브라함처럼 기록해 놓는다면 분명 거듭해서, 반복해서 잘못한 일들이 눈에 도드라질 것입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인생임을 다시 한 번 고백하며 그럼에도 긴급하게 개입하셔서 위기 가운데서 건져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시기에 우리는 오늘도 여전히 그분의 자녀입니다.

아비멜렉은 억울함을 하나님께 호소했습니다. 아비멜렉은 사라가 남편이 있는 여자인줄은 몰랐습니다. 그는 이것을 억울함의 근거로 제시했습니다. 하나님도 이것은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아비멜렉이 사라를 아내로 취하려고 한 것은 그의 말대로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한 일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당시 사라의 나이가 90세입니다. 90세에도 아내로 삼을 만큼 뛰어난 미모와 매력이 사라에게 있었는지는 미지수입니다. 애굽에 내려갔을 때와 달리 그랄에서는 사라의 미모 이야기는 없습니다. 아비멜렉이 미혼일 확률 역시 낮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결혼을 해서 아내를 두고 있는 아비멜렉이 왜 사라를 또 아내로 맞으려고 했을까요? 이것은 아브라함의 부와 명성에서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이 동방의 왕들을 물리치고 롯을 구해온 소문을 어쩌면 아비멜렉도 들었을 것입니다. 이런 아브라함의 여동생을 아내로 맞이한다는 것은 여러 면에서 유익하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아비멜렉이 사라를 아내로 맞은 것은 정략결혼이라는 관점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아비멜렉은 사라가 남편이 있는 여자인줄 몰랐다는 것만 강조하며 억울해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습 속에도 이런 면이 있지는 않는지 찾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네가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반드시 죽을 줄 알라"는 말씀을 들은 아비멜렉은 이른 아침에 모든 종들을 불러 그 사실을 들려주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종들은 심히 두려워했습니다. 결국 아비멜렉은 사라를 돌려보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를 위해(危害)하려고 할 때, 하나님의 자녀가 위기 상황에 처할 때, 하나님은 때로 이와 같은 방법으로 그의 백성들을 보호하시고 건지시기도 합니다.

아비멜렉은 양과 소와 종들을 이끌어 아브라함에게 주고 그의 아내 사라도 그에게 돌려보내며 "내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네가 보기에 좋은 대로 거주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립니다. '왜 잘못을 하고 나면 소와 양과 종이 늘어나는 것이지.' 이런 일이 있고 나서 소와 양과 종이 줄었다면 설교하기도 쉽고 이해하기도 쉬울 텐데 애굽 때도 그렇고 그랄에서도 아브라함의 재산은 늘었습니다. 그렇다고 성도들에게 "재산을 늘리려면 아내를 누이라고 하라"고 가르칠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잘못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인가?

송병현 교수님이 쓴 창세기 주석에 이것을 해석할 수 있는 단초가 있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 자신의 억울함을 증명하기 위해 상대방에게 많은 선물을 주는 것은 그 당시의 풍습이었던 것 같다." 추론이기는 하지만 의미 있는 해석입니다. 송 교수님은 나중에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에게 억울한 일을 당하고 비슷한 행동(창21:28-30)을 취한 것을 이 주장의 근거로 들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억울함을 드러내기 위해 소와 양을 아비멜렉에게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에게 받은 소와 양과 종들은 부끄러움의 상징입니다. 소와 양과 종들이 늘어나면 무조건 복 받았다는 생각에는 변화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늘어남'은 자랑스러운 늘어남이어야 합니다. 사랑합니다.

※ 이 글은 서울염광교회 홈페이지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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