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요환 목사
김요환 목사

목회현장에 서 있는 목회자는 수시로 성도들의 아픔과 상처를 마주합니다. 이들을 위로하고 품어주는 것이 목회자들에는 꼭 필요합니다. 이와 동시에 목회자는 성도들의 죄악된 삶을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무조건 품어주고 상처만 어루어만지는 것만이 목회는 아니기에, 성도가 성화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복음으로 양육해야 할 책임이 목회자들에게는 늘 따라옵니다.

그러나 위로와 훈계라는 이 두 가지 목회적 사명 앞에서 늘 예기치 못한 상황과 갈등이 발생합니다. 그것은 바로 교인들의 죄에 사연이 있다는 점입니다. 너무나 힘든 과거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연을 듣고 나면, 죄가 희미해지고 긍휼함만이 앞서게 됩니다. 나아가 간음한 여인도 품어주셨던 예수님의 마음을 대입하여 용서의 마음이 생겨납니다.

가령 실연당한 형제가 음주운전을 하다가 적발되었습니다. 그 음주운전은 잘못되었으나, 실연당한 자기의 처지와 상황에 대해 울면서 하소연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마음을 알아달라고 요구하면서, 목회자에게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지 않느냐?’라고 묻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목회자는 대개 죄를 지적하고 야단을 치기보다는, 일단 죄를 용서하고 죄의 상황에 몰려있는 형제를 위로하는 쪽으로 목양의 방향을 잡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사연 있는 죄들이 공동체를 더 위험하게 합니다. 만약 위와 같은 상황에서 음주운전 차량에 피해를 입고 상해를 입은 사람이 발생했고, 그 사람 역시 성도라고 한다면 목회자는 어떻게 말해야 할까요?

우울하고 슬프다고해서, 혹 아픔이 있다고 해서 누구나 그와 같은 죄를 범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식이면 히틀러도 사연 있고, 살인자들도 사연이 다 있습니다. 또한 영화 속 악당인 타노스나 볼트모트도 이해받아 마땅한 인생 스토리가 있습니다.

어느 순간 교회 공동체가 위로의 공동체라는 측면만 강조되어 죄가 용납되는 것이 곧 사랑이라는 식으로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죄(하마르티아)는 과녁에서 빗겨감을 뜻합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빗겨간 죄인된 인생을 하나님 중심의 신앙으로 돌려놓는 것이 진정한 교회의 사명입니다.

무조건적 정죄와 비난만 일색하는 공동체도 물론 잘못되었지만, 죄악의 실상과 교회의 치리 및 훈계가 상실되어 무조건적 관용만이 남아있는 교회 역시 건강한 교회 공동체로 보기 어렵습니다.

특별히 ‘사연 있는 죄’를 가지고 와서,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목회자의 그 선한 마음을 악용하여 교회 안에서 마음 놓고 죄짓는 사람들이 실제 우리 주변에 많이 목격됩니다. 이런 경우 교회 공동체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교회는 죄인을 품어주는 공동체라는 원칙을 가지고 가야 하지만, 죄를 용납하는 공동체가 아니라는 원칙도 고수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죄인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었던 사연을 풀어놓기 이전에 죄에 대한 회개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목회자는 예수님께서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셨지만, 그 이후에 ‘다시는 이와 같은 죄를 범하지 말라’리고 말씀하셨던 치리의 측면도 적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지만, 공동체 다른 구성원들도 한 영혼, 한 영혼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으러 떠날 때 아흔아홉마리 양은 안전한 울타리에 두고 떠나셨습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 때문에 아흔아홉마리의 양을 도륙하라는 법은 없습니다.

현재 교회법이나 개교회 정관 안에는 교회 안에서 금품거래가 성도들 사이에서 이루어지거나, 정파를 형성하거나, 이단적 교리를 가르치는 일 등은 교회 장정에 따라 치리할 수 있는 규정들이 있습니다. 또한 공동체의 통일된 규칙과 질서와 규범을 거스리는 것 역시 목회자는 대응할 수 있는 행정적 장치가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죄인들을 수용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품어주면서 동시에 복음으로 변화시키는 곳이지, 어떤 죄이든 나름의 슬픈 사연이나 이유가 있다면, 전부 용납해주고 합리화해주는 곳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신앙을 버리는 이유로서, 어떤 목회자의 타락이나, 교회 안에 벌어졌던 사연을 꼽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교회답지 않다고 화가 나고 속이 상해서, “~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되었어!”라고 말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다 같은 이유로 신앙을 버리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연이 있더라고 그것이 내 신앙을 버리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죄와 실족에는 전부 사연이 있지만, 그 사연이 죄와 실족의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성도가 삶에서 겪는 개인적인 아픔과 상처는 그리스도 안에서 치유되고 회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못 자국난 상처 안에서 인간의 어떤 무게의 상처도 다 치유되는 역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연 있는 죄’라고 해서, 그것이 ‘죄’가 아닌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죄에 맞서 싸우며 승리하는 성도들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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