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동 목사
박현동 목사(십대지기선교회 대표, 청소년 사역자) ©박현동 목사

일명 노는 아이들의 가장 큰 특징은 ‘욱’하는 것이다. 어느 한순간 자신의 생각과 맞지 않다고 생각하면 그것이 친구든 선생님이든 상관없이 모든 상대를 ‘자신의 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흥분한 상태가 진정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변한다. 아마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지 않으면, 그 현장을 촬영한 장면을 보여주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고 믿고 싶을 정도로 다시 평화(?)가 찾아온다. 과연 이들의 모습 속에는 아니 이 땅의 청소년들 마음속에는 어떤 모습이 있기에 이다지도 광풍이 스쳐 지나갈 정도로 변화가 찾아오고 힘들어할까?

정확한 답은 아닐 수 있지만, 30여 년 동안 위기청소년 전문사역 경험을 통한 나름의 결론을 내린다면 청소년들이 제때 받아야 할 사랑을 받지 못할 때 일어나는 아픔으로 결론짓고 싶다. 그렇다면 이들을 가르치는 다음세대 사역자들의 자세 또한 현장에서 접근하는 방법대로 다음과 같이 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정리를 해본다.

‘사랑결핍현상’에 대하여 알고 있나요? 사람은 어느 때든, 누군가에게든지 사랑을 받아야 살아갈 수 있는 존재다. 만약 현재 사랑을 받지 못한다면 반드시 그 사람은 ‘사랑고픔증’에 걸린다. ‘사랑고픔증’의 증상은, 현실을 현실로 받아드리지 못하고 오해와 왜곡으로 억측과 비판 그리고 심한 열등감을 방어기제로 사용한다. 그럼, 태어나서 아동기 때에는 반드시 누구의 사랑을 받아야 할까? 맞다. 바로, 부모님의 사랑이다. 이 세상에 그 어느 누구의 관심보다 부모님의 말 한마디 관심이 아이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만약 부모님이 옆에 계시지 않는다면 아이는 세상을 잃어버린 것처럼 울고불고 난리칠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부모님이 나타나면 언제 그렇게 울었는지 모를 정도로 울음을 뚝 그치고 해맑게 웃는 얼굴을 보게 된다. 바로 이것이다. 아동기 때의 아이들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의미적인 존재가 부모님이다. 부모 이상 더 의미적인 존재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두 번째 의미적인 존재는 누가 될까? 아동기 때의 부모님에서 그다음 단계는 친구다. 부모님의 사랑을 잘 받은 아이는 친구를 사귈 때 힘이 있다. 친구에게는 집착하지도 않고 무시하지도 않는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교제를 나눌 수 있는 대상이다. 그러나 이전 시기인 아동기 때 부모로부터 사랑에 대한 학습이 부족한 아이들은 친구의 사랑을 차지하기 위하여 집착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집착’은 사실을 ‘왜곡’시키는 힘을 갖고 있다. 그래서 현실을 현실로 분석하지 못하고 잘못된 사고와 행동의 원천이 된다. 그러므로 부모님을 잘 만난 아이들은 친구들을 잘 만날 수 있는 확률이 높다. 그러나 부모님으로부터 외면당하거나 버림받은 경험을 가진 아이들은 좋은 친구를 만남으로써 깨어진 자아가 다시 회복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래서 ‘친구 잘 만나야 한다’라는 말이 맞다. 좋은 친구는 인생에 두 번째로 중요한 의미적 존재가 된다.

세 번째로 중요한 의미적 존재는 변하지 않는 이성 즉, 배우자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네 번째 의미적 존재는 자녀다. 생애주기 속에서 누구나 받아야 하는 사랑이지만 이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사랑결핌증’ 증상이 나타날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우리 아이들이 많이 아파하는 것 같다.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포기 아닌 포기를 해야 할 정도로 심각하다. 그럼 우리 교회학교 지도자들은 어떻게 이들을 상대하여야 할까. 방법은 간단하다.

첫째는 부모같이 사랑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여기서 말하는 부모 같은 사랑으로 가르치기는 단순하게 아이와 ‘라포’(관계)를 형성하는 공감과 신뢰 및 수용이라는 상담기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부모에게 주신 무조건적인 사랑과 관심을 의미한다. 말 안 듣는 친구들, 욕하는 친구들, 성질부리는 친구들, 각양각색으로 자신의 표현을 물리적으로 해야 하는 친구들을 상대할 때 부모 같이 이해하고 용서하고 받아드릴 수 있는 마음이 우리 아이들을 변하게 한다. 맞다 선생님들에게 부모 같은 마음을 요구하기에는 마음을 어렵게 하는 부분이 있다. 쉽게 생각할 수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해야 한다.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부모같이 그러면 우리 아이들이 변한다.

둘째는 친구 같은 마음으로 접근하라. 친구는 부모와는 조금 다르다. 부모는 수직적이고 무조건적이라면 친구는 수평적이고 서로 간에 협상(?)이 가능한 존재이다. 삐딱선을 타고 있는 교회학교 아이들에게 건강하게 놀 수 있는 방법을 찾아줄 수 있다면 건강한 친구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예수님도 우리에게 친구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십대가 십대에게 복음을 전하고, 놀이를 같이하고, 활동을 같이하는 것은 역시 친구가 좋다.

마지막으로 배우자같이 접근하라. 이 말을 듣고 ‘이건 말도 안 된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교회 지도자에게 적용하는 언어로 바꿔 말하면 ‘전문성’이라 바꿔 말할 수 있다. 부모 같은, 친구 같은 관계가 형성되면 이제는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전문성이 필요하다. ‘전문가’란, ‘아무나’가 아니다. 아무나가 아니라면 과연 누굴 의미하는 것일까? 준비된 사람을 의미한다. 교회학교 교사나 지도자는 첫째, ‘대상’에 대한 전문성을 가져야 한다. 둘째, ‘기술’이 있어야 한다. 셋째, ‘공동체’를 세울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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