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약속은 지금도 성취를 거듭하고 있다. 아브라함 시대에 가족 단위로 소소히 알려지던 여호와의 이름은 출애굽을 거쳐 이제 온 세계 만방에 확산되었다. 여호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말이다. 모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의 본명은 ‘호세아’였다(민 13:8). ‘호세아’는 ‘구원’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모세는 눈의 아들 호세아를 “여호수아”라고 불렀다(민13:16). ‘여호수아’는 ‘여호와가 구원이시다’는 뜻이다. 이 이름의 헬라어가 ‘예수스’ 즉 ‘예수’(Jesus)이다. 칠십인역과 신약성경은 ‘여호수아’를 모두 헬라어 ‘예수스’, 즉 ‘예수’로 기록하고 있다(행 7:45; 히 4:8).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 안에는 이처럼 여호와의 이름과 영광과 능력이 담겨 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여호와의 영광과 구원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요 11:40). 그러자 죽은 지 나흘이 지나 냄새나던 나사로가 즉시 살아났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이름을 믿으면 영원하신 ‘여호와 엘올람’께서 영생을 주시어 영원히 그분을 찬양하게 하실 것이다.
오경준 – 그건 그런 뜻이 아니에요 3
안수집사로 세워졌다는 것은 교회가 그 사람의 신앙과 인격, 섬김의 자세, 성품과 태도를 깊이 신뢰한다는 뜻이다. 즉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세우신 자리이며, 성도들이 기도하며 인정한 직분이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성도들 앞에서 그 기대와 신뢰에 부합하는 사역자가 되어야 한다. 작은 약속도 신실하게 지키고,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며,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바울은 골로새교회 아킵보에게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골 4:17)고 권면한다. “삼가”라는 표현에는 책임의 무게가 담겨 있다. 모든 사역을 기도하며 준비하고, 신중하게 결정하며, 끝까지 책임진다. 그것이 주님께 받은 직분을 감당하는 바른 자세이다. 직분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이지 사람이 쟁취하는 권리가 아니다.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는 바울의 말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여기서 충성하고, 최선을 다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직분자의 모습이다.
오대희 - 집사를 위한 100일 큐티
1장부터 3장 전반부까지의 내용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상관없이 모든 인간이 죄의 노예로 살고 있는 절망과 진노의 현실에 관한 것이었다. 이곳 23절은 다시 한번 그것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피조물로서의 영광도 잃어버렸고, 하나님과의 사귐에서도 소외되었으며, 그것을 회복할 힘도 능력도 없다. 율법은 이를 지적하고 깨닫게는 해 주지만 이 질곡에서 벗어나게 해 줄 힘은 없다. 그러므로 우선 누군가가 우리를 풀려나게 해 주어야 한다. 그런데 마침내 그가 나타났다. 바로 이 세상에 오셔서 스스로를 그들의 몸값으로 대신 지불하시고, 우리를 죄의 손아귀에서 빼내어 속량해 주신 분,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최성호 - 흐름으로 이해하는 로마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