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이 법원의 확정 판결을 대상으로 헌법소원을 제기할 수 있도록 하는 이른바 ‘재판소원’ 제도 도입에 속도를 내면서 대법원과 헌법재판소 간 갈등이 공개적으로 표면화되고 있다. 재판소원법(헌법재판소법 개정안)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를 통과한 이후 양 기관은 연이어 입장문과 참고자료를 내며 상반된 주장을 펼쳤다.
16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과 헌법재판소는 지난 11일 법사위 의결 직후부터 재판소원 제도의 위헌성 여부와 사법체계에 미칠 영향을 두고 정면으로 맞섰다. 조희대 대법원장의 공개 발언과 헌재의 반박 자료, 법원 내부망 게시글까지 이어지면서 갈등은 한층 격화되는 양상이다.
■ 재판소원 제도 내용과 절차…확정 판결에 한정, 30일 내 청구
본회의로 회부된 개정안에 따르면 재판소원은 ‘확정된 재판’에 한해 청구할 수 있도록 규정됐다. 다만 모든 확정 판결을 대상으로 하는 것은 아니며, 헌재 결정에 반하는 취지로 이뤄진 재판이거나 헌법과 법률이 정한 절차를 거치지 않아 기본권이 침해된 경우 등으로 범위를 제한했다. 헌법이나 법률을 위반해 기본권 침해가 명백한 경우도 포함됐다.
청구 기간은 재판 확정일로부터 30일 이내로 정했다. 또한 헌재의 결정이 선고될 때까지 해당 재판의 효력을 정지할 수 있는 가처분 제도 도입도 명시됐다. 개정안이 시행될 경우 헌재는 확정된 재판을 취소할 수 있으며, 이 경우 법원은 헌재의 결정 취지에 따라 재심리를 진행해야 한다.
재판소원 제도는 확정 판결 이후에도 기본권 침해 여부를 다툴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절차를 도입한다는 점에서 사법 구조에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이에 따라 재판소원 도입이 사법 체계 전반에 미칠 영향에 대한 논쟁이 확대되고 있다.
■ 대법 “소송지옥·사실상 4심제”…재판 지연·불확실성 우려
대법원은 재판소원 도입이 사법체계의 근간을 흔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 조희대 대법원장은 지난 12일 출근길에서 “그 결과가 국민들에게 엄청난 피해가 가는 문제”라고 밝히며 우려를 표명했다.
대법은 법사위에 제출한 의견서를 통해 재판소원 제도가 재판 지연과 소송 비용 증가, 법적 불확실성을 초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독일의 사례에서 재판소원 인용률이 0%대에 그친 점을 언급하며, 실질적 구제 가능성은 낮은 반면 사회적 비용은 커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현재도 재판 적체는 심각한 상황이다. 대법원의 ‘사법연감’에 따르면 2024년 상고심 확정 사건의 평균 처리 기간은 민사 1271.1일, 형사 585.6일(1심 합의부 기준)로 집계됐다. 민사는 평균 3년 6개월 이상, 형사는 1년 7개월가량 소요됐다. 대법은 재판소원 도입 시 사실상 4심제가 운영되면서 사건 처리 지연이 심화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 헌재 “재판에 의한 기본권 침해 구제 필요”…합헌 입장 강조
헌법재판소는 재판소원 제도가 기본권 보장을 위해 필요하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헌재는 지난 13일 배포한 참고자료에서 “재판으로 인한 기본권 침해를 구제할 수 있는 제도는 재판소원이 유일하다”고 밝혔다.
헌재는 확정 판결 역시 공권력 행사에 해당하며, 그 결과로 기본권이 침해된 경우 이를 바로잡을 제도적 통로가 충분치 않다고 설명했다. 기본권 보장은 절차의 속도나 효율성보다 우선돼야 할 가치라는 점도 강조했다.
재판소원이 무분별하게 인용될 가능성에 대해서는 선을 그었다. 본안 심리에 앞서 지정재판부의 사전심사를 통해 각하할 수 있어 사건이 급증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또한 헌법소원심판 비용은 국가가 부담하며, 인지나 송달료를 별도로 납부할 필요가 없고 국선대리인 지원도 확대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 헌법 해석을 둘러싼 충돌…사법권 범위 어디까지인가
재판소원 제도의 위헌 여부를 둘러싼 핵심 쟁점은 헌법 해석에 있다. 헌법 101조의 ‘사법권은 법관으로 구성된 법원에 속한다’는 규정과, 헌법이 법원과 헌법재판소를 각각 별도의 장으로 규정해 권한을 배분한 체계가 주요 근거로 제시되고 있다.
대법은 해당 조항이 재판 권한을 법원에 전속시키고, 최고법원인 대법원의 판단으로 사건이 종결돼야 함을 전제로 한다고 해석했다. 재판소원이 도입될 경우 헌재가 사실상 법원의 상위 기관처럼 기능해 사법권을 침해하게 된다는 것이 대법의 주장이다.
반면 헌재는 헌법 111조가 ‘법률이 정하는 헌법소원심판’을 헌재의 권한으로 명시하고 있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재판소원 허용 여부는 입법자의 재량에 속하며, 헌재는 사실관계를 다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기본권 침해 여부에 대한 헌법적 해석을 수행하는 것이라는 입장이다.
■ 과거에도 반복된 갈등…본회의 통과 여부 주목
재판소원을 둘러싼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의 갈등은 과거에도 이어져 왔다. 헌재는 1997년 12월과 2022년 6월, 7월 등 총 세 차례 대법원의 확정 판결을 취소한 전례가 있다. 당시 법률 해석과 적용을 둘러싼 이견이 충돌로 이어졌다.
최근에는 지난해 5월 1일 대법원이 이재명 대통령의 공직선거법 위반 상고심 사건을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한 이후 재판소원 도입 논의가 정치권에서 본격화됐다. 사법 구조 전반을 둘러싼 논쟁이 다시 불붙은 배경으로 거론되고 있다.
민주당은 재판소원법과 함께 대법관 증원법(법원조직법 개정안), 법 왜곡죄 도입법(형법 개정안) 등을 본회의에 상정했다. 여권은 이르면 이달 내 본회의를 열어 관련 법안을 처리하겠다는 방침이다.
재판소원 도입을 둘러싼 위헌 공방과 사법체계 개편 논란이 이어지는 가운데, 국회 본회의 결과와 향후 제도 시행 여부가 사법 구조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주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