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7년(또는 1898년) 연례회의에 참가한 선교사들. 맨 우측이 아펜젤러 선교사
    132년 전 아펜젤러 선교사의 조선 선교구상
    나는 앤드류 감독이 이곳에 도착하면 나의 이 우둔한 구상을 전하기 위해 이 계획을 지금 다음과 같이 짜고 있다. 나는 서울에서부터 내륙 정탐여행을 마치고 이곳 부산에 있습니다. 나는 내일 귀경하기 위한 출발을 기대합니다. 순행 결과는 선교정책 구상을 총체적으로 변경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항구 도성에 진출하여 조선의 동부지역 사역을 부산에서 해야 합니다. 사역자들이 조만간 이곳..
  • 아펜젤러 선교사(가운데) 가족 사진. 오른쪽에서 두 번째는 부인 엘라, 왼쪽에서 두 번째는 훗날 6대 이화학당장을 역임한 앨리스
    “우리는 조선의 동부지역 사역을 부산에서 해야 합니다”
    본지는 아펜젤러 선교사가 1889년 8월 16일부터 9월 7일까지 23일간 존스 선교사와 함께 서울에서 중부 내륙을 거쳐 부산을 여행한 뒤 귀경하기까지 남부 지역 선교 정탐기를 연재 중이다. 아펜젤러 남부순행 일기를 번역한 리진만 선교사는 지난해 발표한 히버 존스의 일기 번역의 지명 오류를 교정하는 한편, 그들이 숙박했던 경유지의 객사와 당시 지도 등을 수집해 독자들의 이해를 쉽게 했다. 아..
  • 신경준의 『도로고』. 조선 6대로와 남부순행길에 아펜젤러가 이용했던 길 / 1871년 인동읍지 지도
    “조선인들이 가난한 이유는 단지 여인들만 일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금일 아침 우리는 관찰사와 목사(牧使)께서 우리를 기꺼이 면담하겠다는 통보를 받고 강원감영 수부를 떠나기 전 두 분 고관들을 예방하기로 했다. 관찰사는 무뚝뚝한 외모를 가지고 있는 연배가 드신 분이고, 우리에게 대할 때나 말할 때 보면 고지식하고 막무가내처럼 보였다. 수부 전체는 이 감영에서 정한 원칙들로 움직인다. 접견실은 그리 넓지는 않았지만 잘 정돈되어 있었다. 목사는 55~60세 정도..
  • (위) 왼쪽부터 세 번째가 훗날 6대 이화학당장을 역임한 첫째 딸 앨리스, 맨 왼쪽이 아펜젤러,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부인 엘라. (아래) 1889년 부산에서 기록한 아펜젤러의 선교구상 일기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아펜젤러 선교사의 남부순행 일기는 존스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1889년 8월 16일 서울에서 출발해 8월 31일 부산 땅에 도착, 9월 7일 서울에 귀경하기까지 23일간의 선교 정탐 여행기이다. 1889년 당시 미국 공사이던 딘스모어(Mr. Hugh Dinsmore)는 외부(外部)로부터 여행허가증인 호조(護照) 발급을 도와주는 대신 여행 중 설교와 선교 활동은 하지 말고 단지 1달간 전국 어디..
  • 강원감영 대문 포정루의 1912년 이전 모습
    한국 선교사(宣敎史) 연구 활성화되고 바르게 전수되길
    “번역은 반역이다”라는 말이 있다. 수만 리 밖에서 다른 문화와 다른 제도, 다른 관습, 그리고 다른 방언을 가지고 살아가던 이들의 생각을 우리말로 옮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거기에다 130여 년 전 일어났던 일을 현재의 우리말로 정확히 옮기기란 쉽지 않은 작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역자는 번역자가 알고 있는 상식만을 사용해 독자들을 이해시키면 안 된다. 물론 실제 번역 작업에 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