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한경직목사 기념강연회 박명수 교수
©기독일보 노형구 기자

[기독일보 노형구 기자] 2019 한경직 목사 기념강연회가 ‘나라사랑의 씨앗이 된 복음’을 주제로 영락교회 드림홀에서 26일 오후 1시에 열렸다. 이번 강연에는 박명수 서울신학대 교수가 ‘해방 후 월남기독교인들의 국가건설운동과 영락교회 청년회의 탄생’이란 제목으로 발제했다.

그는 기존 한국 역사학계 인식을 빌려 “한경직 목사 및 영락교회의 반공운동에 대해 안 좋은 인식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이유로 그는 “공산주의 반대를 외치면 자연스레 통일을 얘기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역사학계 인식을 말하며, “반공을 앞세웠던 한경직 목사는 맹렬한 비판을 받았다”고 전했다.

다만 그는 2017 미국국립보관연구소에 보관됐던 ‘한경직 목사의 미군정에 보냈던 청원서’를 인용했다. 그는 “한경직 목사는 건전한 책임의식을 가진 기독교인들이 사회를 이끌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며 “만일 해방 직후 북한에 소련이 오지 않았다면, 한경직·조만식을 중심으로 북한사회를 이끌어 갔을 것”이라 예상했다.

특히 그는 “한경직은 자유민주주의를 꿈꾸는 건전한 시민계층이 나라를 이끌어가길 원했다”며 “이를 위해 사회민주당을 건립했다”고 전했다. 그에 의하면, 이우필 장로, 한경직 목사 등이 중심이 된 사회민주당은 기독교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했다. 아울러 그는 “신의주·용천에는 자립으로 경제기반을 꾸린 지식인들이 많았다”며 “공산주의에서 말하는 평등 분배를 따르지 않는,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했다”고 밝혔다.

박 교수는 사회민주당 창당을 촉발했던, 1945년 11월 23일 신의주자치 위원회의 항거사건도 소개했다. 그는 “소련군이 은행 및 병원을 약탈하고, 범죄행위를 저질렀다”며 “이에 분개한 신의주자치 위원회 소속 평북학생자치대는 공산주의 세력이었던 인민위원회에 항거했다”고 전했다. 신의주학생의거로 불리는 이 사건은, 대한민국 최초의 반공투쟁이었다고 한다.

이에 그는 “당시 공산주의 세력들은 소련을 등에 업고, 소총, 기관총, 심지어 비행기까지 동원해 학생들을 공격했다”며 “현장에서 피살자가 24명, 부상자가 3,500명, 체포된 자가 1,000명”이라고 밝혔다. 더불어 그는 “소련 시베리아로 유형 된 자는 200여 명에 이르렀다”고 진술했다.

2019 한경직목사 기념강연회 박명수 교수
서울신대 박명수 교수 ©기독일보 노형구 기자

박 교수에 의하면 당시 한경직 목사는 훗날 인터뷰에서 “신의주 시민은 결코 일본의 독재나 공산주의를 원하지 않았다”고 했다. 때문에 박 교수는 “한경직 목사는 자유민주주의를 꿈꾸며, 청원서를 들고 월남해 미군정에 갖다 줬다”고 전했다.

때는 1945년 12월, 한경직 목사는 신의주 학생의거에 참여한 학생들과 월남했다. 이어 박 교수는 한경직 목사의 월남 이유로, “단지 공산주의를 피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며 “북한의 공산화로 인해 피해 사실을 미군정에 알려 해결하기 위함”이라고 진술했다. 박 교수에 따르면, 1946년 4월까지 월남한 사람은 50만에 이르렀고, 이는 신의주 의거 사건에 상당히 기인함을 박 교수는 강조했다.

이후 그는 “월남한 한경직 목사는 1946년 2월 22일, 영락 교회 베다니 청년회를 만들었다”며 “북한에서 이루지 못한 기독교 민주국가를 설립하려 했다”고 전했다. 이어 그는 “영락교회 베다니 청년회는 반공을 외치며, 공산세력과 싸웠다”고 덧붙였다. 북한 공산주의의 핍박으로 내려왔던 젊은이들은 영락교회로 몰려들기 시작한다.

그들에게 있어 영락교회는 “평안도 출신 피난민들의 유일한 안식처소”라고 박 교수는 설명하며, “베다니 청년회는 신앙공동체 뿐만 아닌, 나라의 미래를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특히 그는 “한경직 목사와 함께 새로 세워지는 나라는 공산주의가 아닌 자유민주주의 국가여야 한다는 분명한 확신을 가졌다”고 진술했다.

나아가 그는 “해방 전후 공산주의자들은 그 이념에 따라, 법치보단 폭력 투쟁을 정당화했다”며 “급기야 1946년 10월 대구에서는 남노당에 의한 폭동이 발생했다”고 설명했다. 이 과정 가운데 그는 “월남했던 청년들은 남한사회의 공산화를 우려해, 11월 30일 YMCA에 모여, 서북청년단을 조직했다”며 “당시 김구 또한 서북청년단과 함께, 북한 공산주의와 싸워야 한다는 생각이 강력했다”고 밝혔다.

이 대목에서 그는 “한경직 목사는 1946년 11월 영락교회 창립 1주년 설교 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밝혔다.

“십자가를 가지고 노동과 정치운동을 합시다”

박 교수는 “ 한경직의 말은 기독교인들이 나가야 할 방향을 알려주는 것”이라며 “북한에서 기독교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핍박 받다 월남한 이들이, 남한에서 기독교 민주주의 국가를 세우려 했던 것”이라 했다. 하여 그는 “이를 위해 서북청년단을 세워 보다 적극적으로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됐다”고 진술했다. 공산주의의 다소 과격하고 폭력적인 행태로 인해, 서북청년단도 다소 과격한 노선을 취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박 교수는 “서북청년단에 영략교회 청년들이 주도적이었다는 설(設)도 있다”며 “그러나 이는 확실치 않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당시 서북청년단은 문봉제와 백남홍이 주도했다“며 ”후에 평북 출신 선우기성이 서북청년단의 단장이 됐지만, 이들이 영락교회에 직분을 맡았다는 기록을 찾지 못했다“고 전했다.

다만 그는 ”영락교회 청년들이 서북청년단에 활동한 것은 사실“이라며 ”하지만, 이들이 주도적으로 이끌어 갔다고 말하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그는 "영락교회 10년, 30년, 50년사를 뒤져봤다"며 "아직까지 서북청년단에 주도적이었던 사람이 등재된 걸 발견하지 못했다"고 했다. 즉 그는 “서북청년단과 영락교회 간 연결 관계는 명확하지 않다”며 "좀 더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라 덧붙였다.

뒤이어 이혜정 영남신학대 교수가 ‘한경직의 기독교적 건국이념 - 복음 해석을 중심으로‘를 발제했다.

2019 한경직목사 기념강연회 박명수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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