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노
▲푸른교회 조성노 담임목사

고독과 우수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1875.12.4.-1926.12.29.)의 <가을날>입니다.

<주여, 때가 왔습니다 / 지난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얹으시고 / 들녘엔 바람을 풀어 놓아 주십시오.>

그렇습니다. 가을 신앙은 이렇듯 기도하는 신앙입니다. 뜨거웠던 지난 여름을 회고하고 잘 익은 바람의 향기를 맡으며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겁니다. 마치 수도사와도 같은 청빈한 가을빛 영혼으로 긴 편지를 쓰듯 그렇게 맑고 깨끗한 기도를 드리며 자신을 비우는 겸허함, 그래서 가을 신앙은 기도로 영혼이 더욱 깊어지고 가을 하늘처럼 투명해지는 영성입니다. 릴케가 체코의 프라하 대학 에서 독일 남부의 뮌헨대학 문학부로 옮긴 후 낸 생애 첫 시집 <기도시집, 1905년>은 자신의 간절한 염원을 시적 언어와 구성으로 엮은 <기도문>으로 그의 창작 행위가 근본적으로 신앙의 치열성을 담고 있으며 하나님을 향한 끝없는 날갯짓인 기도에 다름 아님을 암시한 것입니다.

또한 가을 신앙은 열매 맺는 신앙입니다.

<남은 과일들이 무르익게 하시고 / 이틀만 더 햇빛을 주사 / 그것들이 다 제맛을 내게 하시고 / 진한 포도주의 마지막 단맛이 스미게 하소서.>

시인은 가을 햇볕 속에서 익어가는 과일들의 완숙을 위해 주님의 은총과 축복을 빌고 있습니다. 가을 신앙이 소중하고 우리에게 큰 의미가 있는 것은 과일 내음 그윽한 잘 익은 그 신앙의 열매들 때문입니다. 주님은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요 15:8)고 하셨습니다.

가을 신앙은 줄기에 든든히 붙은 가지처럼 열매를 많이 맺되 단맛 진한 포도 같고 감칠맛 나는 올리브 같은 신앙입니다. <예술가에겐 깊은 외로움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 했던 릴케는 가을날 느끼는 서정에 열매와 결실을 더해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삶의 깊이를 근원적으로 성찰했던 시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가을 신앙은 풍성하고 향기롭고 고독하며 또 고결합니다. 가을 신앙은 자신의 삶에 충실하면서 소박한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만이 가꿀 수 있는 꿈이며 겸허함과 경건함입니다.

뿐만 아니라 가을 신앙은 겨울을 준비하는 신앙입니다.

<이제 곧 겨울이 올 것입니다 /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 더 이상 집을 짓지 않을 것입니다 / 지금 혼자인 사람은 그렇게 오래 남아 깨어서 /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쓰며 / 낙엽이 흩날리는 날에는 가로수들 사이로 / 이리저리 불안스레 헤메일 것입니다.>

릴케의 운명의 겨울은 생각보다 일찍 저물었습니다. 흔히 그가 장미 가시에 찔려 죽었다고 하지만 사실은 백혈병으로 자리에 누웠습니다. 1926년 12월 29일 새벽 릴케는 51세를 일기로 스위스에서 고독한 생을 마감했습니다. 시신은 그의 유언에 따라 스위스 라롱의 교회 묘지에 안장되었고, 묘비 역시 자신이 유언장에 남긴 그대로 적었습니다.

<장미여, 순수한 모순이여, 기쁨이여, 그 많은 눈꺼풀 아래에서 그 누구의 잠도 아닌 잠이여.>

언제 닥칠지 모르는 자기 운명의 겨울을 준비하는 진지함이 바로 진정한 가을 신앙입니다. /노나라의별이보내는편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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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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