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 '신학단상' 은 평신도들의 신학적 소양 함양(涵養)을 위해 각종 행사 등에서 신학자 및 목회자들의 발제문을 뽑아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지난 9일 서울 서초구 창신교회에서 개최된 한국복음주의 실천신학회(회장 박상구 박사) 제29회 정기학술대회에서 발제한 웨스트민스터신대원 교수 김선일 박사의 발제논문을 연재합니다. 마지막 편. <편집자주>

▲김선일 교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4. 복음주의적 수용을 위한 이중적 과제: 복음 전도와 예배 공동체

선교적 교회론에 대한 복음주의적 의구심은 미시오 데이 사상의 영향에 대한 의심에서 비롯 된다. 즉, 선교라는 개념을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의 선한 공적 실천만 강조할 뿐 죄 용서와 구원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첫 번째다. 또한 교회의 성육신적 측면만 강 조함으로 하나님의 임재와 은총을 갈망하는 예배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간과할 수 있다고 본 다. 이 문제는 특히 교회의 전통적 표지를 강조하는 개혁주의의 관점에서 제기될 수 있다. 이 두 과제는 정도의 차이에서 동등하지 않다. 전도의 과제는 선교적 교회운동에서도 상당 히 빈번하게 언급되고 있다. 예배 공동체로서 교회의 정체성 또한 적잖이 논의되고 있지만 무게 중심이 세상에서의 증언이라는 사명에 더욱 실려 있기에 복음주의적으로 보완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필자는 복음 전도를 선교적 교회와 복음주의의 수렴점으로, 예배 공동체를 선교적 교회의 복음주의적 보완점으로 구분하여 대응하고자 하다.

1) 복음 전도: 선교적 교회와 복음주의의 수렴점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전도의 당위성은 복음주의 운동의 핵심이자 특징적 표지이다. 복음주 의는 소위 영혼 구원을 지향하는 회심과 제자도를 강조한다. 하지만 복음주의 진영에서는 통념적으로 에큐메니컬 선교는 사회정의, 인권, 도시권, 환경운동 등을 통한 인간화에 집중 한다고 비판하며, 반면 에큐메니컬 진영에서는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선교는 내세적이고 개 인주의적인 구원에 머무름을 지적한다. 이처럼 선교와 전도에 관한 대립적 구도에서 선교적 교회론이 양자의 논의를 수렴해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1) 선교와 전도의 관계: 선교와 전도의 관계를 정립하는 것은 회심과 전도를 강조하는 복음주의운동에서 선교적 교회론을 수용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미 선교와 전도의 개념 자체가 서로 모호한 가운데 혼용되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선교는 타 문화권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행위를 가리키고, 전도는 동일 문화권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는데, 이럴 경우 지리적 차이 외에는 별 다른 의미상의 차이가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호켄다이크를 비롯한 에큐메니컬 진영의 선교 사상은 선교를 공적인 세계에서의 인간화를 위한 총체적 노력으로 정의하였다. 이러는 가운데 전통적 구원과 전도 개념은 거 의 상실되고 선교가 곧 세상을 향한 행동으로 동일시되었다. 레슬리 뉴비긴은 이미 에큐메니컬 운동의 선교가 그리스도와 구원을 중요하게 다루지 않음을 통렬히 지적했다. "하나님 의 선교라 불리는 이 교리가 때로는 교회와 심지어 예수의 이름까지 회피하는 선교 개념을 지지하는데 이용되어 왔다." 이에 대해서 복음주의 선교사상을 대표하는 로잔언약(Lausanne Covenant)은 복음전도와 사회참여라는 양자의 관계를 정립하려고 노력함으로 써, 미시오 데이에 나타난 세상을 향한 책임에 어느 정도 동의를 하면서도 복음전도의 우선 성과 차별성을 견지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그의 구원받은 백성을 아버지가 그를 보내셨듯이 세계 속으로 보내 신다. 또한 이것은 세계 속으로 깊이 그리고 값을 지불하면서 파고 들어가는 것을 요구 한다. 우리는 교회적 게토에서 벗어나 비기독교적 사회로 들어가야만 한다. 희생적으로 봉사하는 교회의 선교 속에 전도는 가장 중요하다. 세계복음화는 온 교회가 온 세계에 온전한 복음을 전할 것을 요구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우주적 계획의 중심에 있으며 복 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임명받은 그의 수단이다.

로잔언약은 이어지는 선교 대회를 통해서 전도와 사회적 책임의 관계를 더욱 통전적으로 이 해하는 노력을 기울였으나, 원칙적으로 복음전도의 중심성은 유지되고 있다. 이와 같이 로잔언약이 대변하는 복음주의적 선교 이해에서는 선교가 세상을 향한 교회의 총체적인 섬김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음이 잘 드러난다. 그리고 에큐메니컬 진영의 통전적 선교사상에서 복 음전도의 위치가 불안정했던 것에 반해, 복음주의는 삶의 전 영역에 관여하는 선교의 틀 안 에서 속죄적 복음의 전파가 핵심임을 천명한 것이다.

따라서 선교는 거시적이고 총체적 차원에서 교회의 세상을 향한 섬김과 증언이라면 전도는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은총을 통한 회심을 위한 핵심적 사역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 은 이해는 이제 진영 간의 대립을 넘어서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WCC 신학위원회에도 참 여한 바 있는 감리교 신학자 데이나 로버트(Dana Robert)는 선교와 전도의 관계가 오랫동안 혼동되면서, 불필요한 오해가 초래되었음을 지적한다. 전도는 구원과 내세에 관한 것으 로, 선교는 지금 여기서의 행동에 관한 것으로 인식되기도 했으며, 전도는 교회성장 기법으 로 선교는 하나님의 선교적 속성으로 오해되기도 했다는 것이다. 로버트는 이에 대한 해법으로 전도를 선교의 심장으로 보고, 선교를 전도의 몸으로 보는 방안을 제시한다. 이는 전도와 선교의 유기체적 이해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지니는 추동력을 강력하게 견지 하면서도 하나님 나라의 통치라는 선교적 방향성을 겸비하게 해준다. 선교를 총체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사역인 전도의 핵심성을 유지하는 이러한 자세는 종래 에큐메니컬 진영의 선교 사상과 복음주의적 강조를 조화시킬 수 있는 통찰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와 구원 중심을 견지하고 이를 위한 교회의 책임을 충분히 강조한다면, 삼위일체 하나님의 속성으로부터 선교의 근원을 이해하는 하나님의 선교 사상 과 복음주의 선교 사상 간의 생산적인 상호 대화를 가능케 할 것이다.

(2) 개인적 복음과 공적 복음의 통합: 선교적 교회론의 신학적 기초를 면밀하게 구성했던 데릴 구더는 복음전도에 대한 통념적 이해에 진지한 문제 제기를 던진다. 그는 서구 기독교가 지난 1500년 이상의 기독교 세계(Christendom) 영향 아래서 복음을 개인적인 차원으로 축소시켰음을 통렬히 지적하였다. 어느 시대마다 복음이 새로운 문화권으로 전파됨에 따라 기존 문화에 적응하는 현상은 불가피한데, 계몽주의 시대에 복음이 개인을 위한 구원으로 축소된 것에 대해서 구더는 오늘날 서구 교회의 새로운 전면적 회심이 요청될 정도로 심각한 왜곡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온 세상을 위한 하나님 나라의 통치와 그에 부응하는 증언의 사명이라는 구원의 더 큰 측면을 가리고, 오직 구원을 개인의 내면적 안정과 영생을 위한 수준으로 전락시킨 전형적인 축소주의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뉴비긴도 종교다원주 의자들이 기독교 진리를 상대화시키는 것에 대해 강력하게 논박하면서, 역사를 변화시키고 완성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지니는 역사적이며 공공적 성격을 강조한다.

신앙에는 보편적 의향이 담겨 있다. 신앙을 '나의 개인적 의견'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 라 만인에게 해당되는 진리로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공개적으로 단언 되어야 하고 공적인 심문과 논쟁에 열려 있어야 한다. 구체적으로, 예수께서 명령하신 것처럼 그것은 모든 나라에, 인종과 신조와 문화와 상관없이 모든 인간 공동체에 전파 되어야 한다. 그것은 공적인 진리다. 우리가 모든 민족에게 그것을 권할 때, 성령이 그 들 마음속에서 증언하셔서 그들 스스로 그것을 진리로 볼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한다.

뉴비긴과 구더와 같은 선교적 교회 사상의 선구자들은 복음의 공공성 회복을 강하게 피력하며 개인화된 복음에 반대한다. 그런데 두 사람의 경우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구더의 경우 에는 서구 개인주의와 소비주의 문화 속에서 복음이 사사화되는 현상을 비판한다면, 뉴비긴은 오히려 서구의 세속적 합리주의와 다원주의에서 복음이 개인의 주관적 신념으로 전락 되어 객관적 설득력이 약하다는 인식에 기독교의 공적 복음 됨으로 도전하는 것이다. 더군 다나 뉴비긴의 경우는 개인적으로 뚜렷한 회심 체험을 가졌으며, 오랜 선교사 사역을 통해 서 믿음과 구원의 우선성을 강조해왔기에 복음 전도의 실체에 훨씬 더 가깝다.

선교적 교회론에서 제기하는 복음의 축소 현상은 복음주의적인 입장에서도 비판할 사안이지 만, 만일 공적 복음을 강조하면서 이것이 회심을 목표로 하는 개인 구원의 전도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재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이는 총체적 선교와 핵심적 전도라는 양자의 관계와도 어울리지 않는다. 물론 그 동안 개인구원의 복음과 공적 복음을 병행해야 한다는 여러 주 장들이 있었다. 그러나 양자는 단순히 병렬적 중요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 유기적 통합성을 갖는다. 하나님 나라의 통치라는 공적 복음은 그러한 거시적 구원 계획안에 신자 개개인이 소속되어 새로운 정체성과 사명을 발견하기에 개인적으로도 복음이 된다. 지나치게 개인화 된 복음을 비판한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의 계획안에서 한 사람이 지니는 가치와 소중함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개인구원의 중요성은 단지 영혼구원이나 내세의 영생 교리 때문만이
아니다. 개인은 그 어떤 집단이나 공적 의제보다 더욱 중요한 가치라는 신념 때문이다. 앞 서 살펴보았던 선교적 교회사역의 실천적 흐름에서도 삶의 미시적 영역에서 한 개인과의 인 격적 교제가 중요하게 부각되는 것도 이와 맥을 같이 한다.

(3) 전도의 맥락으로서 선교: 선교적 실천은 지역에서 이웃과 함께하는 삶으로 표현된 다. 지역의 당면과제와 이슈들에 관심을 갖고 그 안에서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민감하게 응답하여 동참하는 것이다. 이러한 선교적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전도 의 맥락을 형성한다. 단순히 이웃을 환대하고 그들과 더불어 삶을 공유하는 것이 복음전도 의 도구이거나, 혹은 선포 전도의 선행 단계인 현존 전도로 분류될 수만도 없다. 복음적 생 활양식(forms of life)을 구현하는 것 자체가 복음 선포다. 복음은 언어로 전달되기도 하지 만, 비언어적 매체를 통해서도 전달된다. 물론 기독교 진리의 명료한 제시와 이에 대한 응 답은 전도의 과정에서 당연히 필수적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은 차별 적이고 대안적인 삶은 단순히 현존이 아니라 그 자체가 비언어적 선포라 할 수 있다. 인간 은 삶의 양식을 경험함으로써 그 삶이 기초하는 진리의 개념을 이해하고 수용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선교가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총체적 섬김이라면 이는 복음의 실체를 보 여주는 경험적 메시지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선교는 전도를 위한 도구가 아니다. 또는 복음주의 권에서 오해하듯 선교적 실천은 개인이 구원받은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세상을 향한 대안 문화적 삶 그 자체가 복음의 해석이자, 전도의 맥락인 것이다.

(4) 선교의 궁극적 초점으로서 복음 전도: 이러한 인식 하에서, 복음 전도는 선교의 궁 극적 초점이 된다. 선교의 초점이라는 말은 전도가 감추어진 목표라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전도는 선교의 자연스러우면서, 의도적인 결론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적인 지역 공 간에서 이웃과 교제하며 삶을 진실하게 공유한다면 이는 인간 내면의 상태에 관한 영적 대 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보쉬가 잘 간파했듯이, 복음 전도에서는 "오직 사람에게 메시지가 전달되고, 사람만이 응답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필자는 선교적 교회 의 사역이 공적 프로젝트의 형태로만 진행되어서 인격적 접촉이 부차적으로 밀려나는 것에 반대한다. 지역과 이웃을 대상화시켜서 시혜적 행위를 베푸는 것이 선교적 실천이 아니라, 사람과의 만남에 중점을 두고 그 만남으로부터 삼위 하나님의 역사를 감지하고, 함께 공동 의 생활양식을 모색하는 가운데, 진정한 인격적 교류로 말미암아 회심과 영적 교제가 일어 나기를 기대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선교의 초점인 전도는 반드시 회심 혹은 설득에 이르는 전도여야 하기보다는, 복음의 선포와 증언으로서의 전도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회심과 설득은 인간의 실천으로는 장담할 수 없는 성령의 역사로 봐야 하기 때문이다. 온전한 선교적 실천은 교류와 대화 속에서 자연스럽게 전도라는 초점으로 나아갈 것이 다.

2) 예배 공동체: 선교적 교회의 복음주의적 준거점

선교적 교회론은 에큐메니컬 진영의 '미시오 데이' 개념을 계승하면서도 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지 않고, 기존의 하나님-세상-교회라는 구도에서 다시 교회의 중심적 역할을 회복했 다고 볼 수 있다. 뉴비긴은 공적인 진리로서 기독교 신앙을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인간 역 사의 종결자로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하는 유일한 해답은 '복음을 믿고 복음에 따라 사는 남자와 여자들로 이루어진 회중'51)이라고 단언하는데, 이와 같은 '복음의 해석자 로서 회중'이라는 개념은 후에 그의 사상을 계승하여 선교적 '교회론'이 발전하는 모태가 된 다. 한편으로 선교적 교회운동이 교회의 선교적 소명을 강조한 기여는 인정하면서도, 선교 가 교회를 규정한다는 주장에 대해 복음주의권에서는 신중한 입장을 취하기도 한다.

(1) 교회의 표지와 선교: 선교적 교회론에서는 보냄 받음이라는 사도적 정체성을 교회 의 본질로 강조하며, 더 나아가 '선교적'이라는 용어는 복음에 드러난 하나님의 속성이기에 신학의 제 분야와 교회의 삶이 이러한 선교적 특성에 비추어 재구성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교회는 증인의 역할에 충실할 때만 참된 교회가 되며, 그리스도와의 연합 또한 사도적 정체 성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혁주의 전통에서 교회의 대표적 표지를 말씀 선포와 성례 집행, 바른 권징이라고 규정할 때, 선교적 교회에서 말하는 사도적 정체성에 대한 이해가 편향적이고 피상적으로 보일 수 있다. 교회가 "선지자와 사도들의 터 위에 세워졌다"(엡 2:20)는 것은 사도성의 현 재적 계승이 아니라 사도들이 전한 가르침과 그들의 규범적 권위 아래 있음을 의미하기 때 문이다다. 또한 선교적 교회론에서 교회의 가시적인 연합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과 교회의 본질적 표지가 간과될 수 있다는 주장도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선교적 교회의 대표적 실천가들인 프로스트와 허쉬도 이 점을 인식하며 선교적 교회 운동이 결코 교회의 전통적인 표지들을 소홀히 하며 선교만을 내세우지 않는다고 강변한다. 그들은 교회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예배, 공동체, 제자도, 선교라는 네 가지 핵심 기능을 갖는다고 말한다. 다만 여기서 선교는 다른 기능인 예배와 공동체, 제자도를 활성화시키 는 촉매 기능을 한다고 강조한다. 즉, 선교가 교회의 대표적 표지라기보다는 교회의 고유한 각 실천 영역들이 선교라는 추동력을 통해서 더욱 온전하게 살아날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러한 점에서 선교적 교회론은 신자의 구원과 제자도라는 교회의 기능들을 중요하게 여기는 복음주의적 신념과 지속적 균형을 갖출 필요가 있다.

(2)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 선교적 교회 주창자들은 그 동안 사람들을 건물과 프로그램이 중심이 된 교회로 끌어 모으는 방식에 관해서 비판적이었다. 대신 교회가 사람 들을 세상 속으로 보내서 문화 가운데서 복음의 해석자가 되어 대안적 삶을 사는 것에 더욱 집중하였다. 그러나 근래에 선교적 교회 사역자들 가운데에는 끌어 모으는 교회 (attractional church)라는 개념을 쉽게 치부할 수 없다는 신중론도 있다. 댄 부첼레(Dan Bouchelle)는 선교적 교회의 반대는 '끌어 모으는'(attractional) 유형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뽑아내려는'(extractional) 유형이라고 교정해 준다. 세상에 참여하는 성육신적 삶을 강조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예배자가 되도록 교회와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매력적이 되는 노력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삶의 현장에서 선교에 동참하게 하지 않고 오로지 교회 일만 하게 하는 것은 그릇되지만,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적 삶이 '매력적'(attractive)이어야 하는 것 자체는 선교적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끌어 모으는 교회와 성육신적 교회를 대비시킬 것이 아니라,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라는 이중적 속성을 이해하고 균형을 추구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는 의미이다.

선교적 교회 개척과 훈련을 주도하는 휴 홀터(Hugh Halter)와 매트 스매이(Matt Smay)도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의 개념이 상호 긴밀하게 연결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특히 이 들은 모이는 교회가 예배와 가르침, 목양, 제자도 등의 내향적 성격을 유지하는 것은 새로 운 신자들을 포함하고 그들에게 소속감을 부여하는데 필요한 환경을 제공한다고 한다. 또 한 과거의 경우들을 볼 때, 흩어지는 교회에 더 가까운 형태라 할 수 있는 캠퍼스 선교 단 체나 세상 속의 사역 공동체들이 처음에는 전도에 열심을 보이고 상당한 열매를 거두다가도 자기들끼리의 유기적이고 성육신적 공동체를 이루는데 더욱 몰두하면서 전도의 과제도 잊고 교회로도 이어지지 못하는 결과를 종종 낳는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현장 사역자들의 지혜 와 지적을 경청하며, 끌어 모으는 교회와 성육신적인 교회는 상호 대립적 개념으로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사명을 부여하는 동역의 관계로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3) 예배 공동체의 의미: 그렇다면 선교적 교회론을 보완할 수 있는 모이는 교회의 핵심 은 무엇일까? 그 답은 교회의 예배 공동체적 성격에서 찾을 수 있으리라 본다. 존 파이퍼 (John Piper)는 "선교는 교회의 궁극적 목표가 아니다. 예배가 목표다. 예배가 없기 때문에 선교가 필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궁극적인 존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기 때문이다."59) 는 유명한 선언을 한 바 있다. 물론 선교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적 본성이라는 점을 고 려할 때, 파이퍼의 주장처럼 선교를 사람에게 초점을 맞춘 것으로만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이처럼 예배가 선교의 목표이자, 선교의 연료가 된다는 그의 주장은 선교적 교회론에서 자칫 세상으로의 참여지향적이고 행동중심적인 성향으로 교회의 초월적 존재론으로부터 벗어나지 않도록 견제해줄 것이다. 선교학자 안승오도 그의 논문에서 선교적 교회론에서 모이는 교회를 충분히 강조하지 않는 것을 지적하며, 선교와 예배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요청한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아 하나님과 대면하고 교제하는 예배의 훈련이 신자를 선교 적 백성으로 이끄는 원천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선교적 교회 사역자들도 예배를 동등하게 강조하기 시작했다. 허쉬는 예배의 핵심 행동에는 인생의 모든 영역들을 하나님의 주권 아래 바친다는 의미가 담겨 있기에 선교적 교회는 우 리의 세상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차원에서 예배를 본다고 말한다. 스파크스와 소렌스, 그 리고 프리즌도 예배가 교회의 중심임을 인정하면서, 예배의 삶은 단지 주일 모임에서만 이 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중에 지역 사회 속에서 신앙을 살아내는 공동의 삶까지 포함한다고 주장한다.62) 예배와 선교를 긴밀하게 잇는 이러한 이해에 덧붙여, 필자는 예배가 선교적 지 향성을 갖추는 것도 필요하지만, 어둔 세상에서 빛으로 불러내신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 아가는 예배의 은총적 속성 또한 동등하게 강조되어야 한다고 본다. 예배가 선교의 원천이 고 연료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이 충분히 다루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선교가 인간의 의지적 행동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개혁주의 전통의 예배에서 참회의 고백 과 사죄 선언이 앞부분을 장식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죄인인 인간이 예배를 통해 하나님 의 임재와 능력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와 구원이 선행하였기 때문 이다. 예배는 늘 대속의 은총을 재확인함으로 하나님을 높이고 경배할 수 있으며, 이를 통 해 선교를 위한 능력함양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예배의 은총적, 속죄적 성격은 복음주의 운동의 회심주의와 십자가 중심주의와도 잘 연결될 수 있다고 본다. 복음주의는 근본적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은혜로 말미암은 중생을 위한 사역에 일차적 관심을 두기 때문이다. 선교적 교회론이 교회 공동체의 선교적 사명을 재발견케 한 것은 복음주의 운동과 신학에 중요한 기여를 할 수 있다. 부흥과 회심이 단순히 개인이나 운동가들의 사역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일어 나야 함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복음주의 운동은 선교적 교회론이 모이는 교 회의 예배 공동체적 성격에 더욱 주목하도록 보완적 기능을 할 수 있으리라 본다.

5. 결론

지금까지 필자는 선교적 교회론의 복음주의적 수용 방향을 살펴보았다. 특히 선교적 교회론 의 실천적 흐름이 매우 실제적이고 일상적인 사역의 장을 형성하고 있음을 밝히고, 이 흐름 을 실천신학의 두 초점인 선교적 초점과 교회적 초점에 상응하는 복음주의적 수용의 이중 과제로 평가하였다. 즉, 구원과 속죄 중심의 전도 사역과 교회를 강조하는 복음주의 운동은 선교적 교회를 전도적으로 수렴하며, 예배 공동체로 보완할 수 있다고 진단했다. 선교적 교 회론의 선교 개념과 전도 이해, 그리고 교회관은 복음주의와 개혁주의 진영에서 종종 비판적으로 소개되고 논쟁 포인트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실천신학적 관점에서 선교적 교회라는 개념의 사유적 원천도 중요하지만, 현재의 프락시스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프락시스에는 목적과 의미에 대한 이론이 내포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선교적 교회론이 구체적인 공간과 시간에서 성육신적 삶을 실천하며, 세상과 일상에서 증인으로 산다는 보냄 받은 사명에 천착하고 있다는 점은 복음주의 운동이 함께 할 수 있는 유력한 현황이기도 하다. 특히 복음주의 운동은 선교적 교회론의 이러한 프락시스를 선교와 전도의 온전한 이해에 비추어, 복음전도적 수렴점으로 이끌 수 있다. 또한 회심에 가치를 부여하는 복음주의적 신념은 선교적 교회가 행동주의적 선교에 천착하지 않고, 구원과 은혜 의 예배 공동체라는 보완적 준거점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선 교적 교회론에 대한 논의가 복음주의 교회와 운동 안에서 상호적 이해에 기초하여 비판적으로 수용되며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위해 동역할 수 있는 가능성을 기대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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