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학교교육연구소 학술대회서 박상진 박사가 발표하고 있다. ⓒ신태진 기자

기독교학교교육연구소(소장 박상진 박사)가 21일 오후 6시, 숭실대 벤처관에서 ‘기독교학교 역사에 길을 묻다’라는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이 학술대회는 100년 전 초기기독교학교 역사를 통해, 현재 기독교학교들의 어려움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해 마련됐다.

현재 한국의 기독교대안학교 수는 102개교에 이른다. 그 중 대부분은 교회에 의해 설립됐지만, 학교운영에 관한 교회의 관여 정도, 재정지원의 범위, 학생 선발 기준 등 여러 가지 과제를 안고 있는 실정이다.

먼저 박상진 박사(장신대 기독교육과)는 한국 토착교회들이 학교를 설립한 것에 주목하여, △초기 한국교회의 학교 설립 현황과 목적 △초기한국교회와 학교의 관계성 △초기기독교학교가 오늘날 한국교회와 기독교학교에 주는 교훈 등의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한국 기독교학교 운동의 효시는 언더우드·아펜젤러·스크랜트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경신·배제·이화학교다. 하지만 이후 한국교회 부설로 기독교학교들이 활발하게 설립됐는데, 1909년에는 장로교 학교만 694개교에 이를 정도였다. 용재(庸齋) 백낙준 선생은 이를 두고 ‘문예부흥’이라 일컬었다.

▲박상진 박사가 발표하는 모습. ⓒ신태진 기자
특히 토착 한국교회들의 초등학교 설립운동은 선교 초반부터 활발하게 일어났는데, 자립·자조·자주치리를 기반한 네비우스(J.L. Nevius) 선교정책에 따른 것이었다. 1897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 교육정책에는 “그 무엇보다도 이 학생들이 교회의 주류가 되어서 토착교회(native church)를 형성하게 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당시 교회의 학교설립 운동은 종교가 다른 한국인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평양에서 활동한 스왈른(W.L. Swallen) 선교사는 “만약 교회가 기독교 교사들을 제공한다면, 불신자들은 돈과 자신들의 옛 유교학당 시설들을 헌금하고, 심지어 주일예배에 자신들의 자녀들을 보낼 것을 약속했다”고 말했고, 노블(W.A. Noble) 선교사는 “외인들도 말하기를 자식은 교회학교에 보내야 잘된다더라”며 교회학교가 일반인들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음을 나타냈다.

선교사들이 세운 미션스쿨의 주목적이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면, 교회 부설학교들은 교인 자녀들을 교육하기 위해 세워졌다. 1912년 예수교장로회 조선 총회 제1회 회록에는 “각 직원들이 교회자제들을 권하여 교회학교에서 공부하여야 할 뜻으로 가르치고 공부케하오며, 교회안 자제 중 준수한 자를 교회가 도와주어 교회 일군 되기까지 배양하오며”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그런데 당시 교회가 학교를 설립하여 기독교육을 하고자 했던, 보다 깊은 이유가 있었다. 1901년 신학월보에는 “우리나라 학교의 수가 적지 아니하고 교육받은 학도가 비록 여러 천명이나 다만 그 외문만 숭상하고 참도가 그 안에 없는고로 마침내 교육에 효험이 없고, 그 학도의 지혜를 능히 달달치 못하니 심히 개탄할 일이로다”라며 학문교육을 통한 기독교인재 양성이 학교설립 목적이며, 독특한 목적을 지닌 기독교학교를 설립하려는 의지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일제의 침탈로 나라를 잃은 상황 속에서,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는 구국운동이 교회설립학교의 중요한 목적이었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면서, 항일운동의 차원에서 교회설립학교들이 급속하게 확산됐다.

당시 기독교학교를 위한 교회 조직으로는, 장로교 노회 안에 세운 학무국, 학교 교육과정을 지도·감독하는 학교과정위원, 기타 지교회 조직 등이 있었다.

장로교 교회부설 초등학교 수는 1887년 1개교에서 점진적으로 증가하다가, 1900년대에 급속도로 증가하여 1904년에는 115개교에 이르게 된다. 이는 같은 해 감리교학교 수 36개교에 비해 3배 이상이 많은 것이다. 또한 1908년 장로교 독노회 통계를 보면, 평안북도의 경우 예배처소는 108개이지만, 초등학교 수는 이보다 많은 148개교로 나타나 한 교회가 두, 세개 학교를 세운 사례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1909년을 정점으로 교회가 설립한 학교들이 쇠퇴하기 시작한다. 주된 이유는 재정적인 어려움, 일제 통감부의 지나친 통제, 관립학교의 등장 등이 있다. 1915년 총회 학무위원 보고에는 “재정 곤란으로 유지하기 ‘극난’이오며”라는 표현이 나와있다.

박 박사는 초기기독교학교 역사가 오늘날 한국교회와 기독교학교에 주는 교훈에 대해 △교회가 기독교학교 운동의 중심에 서야 할 것 △학무국과 같은 교회내 기독교학교 지원체계를 마련할 것 △초교파적 ‘기독교학교 후원회’를 구성하여 재정적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울 것 △‘대안학교 설립운영에 관한 규정’에서 인가 기준을 조절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 △학교연합 및 교단간 연합활동에 힘쓸 것, △기독사범대학, 기독교원대학 설립을 위해 힘쓸 것 △기독교학교의 건학이념과 정체성을 지킬 수 있도록 법적, 제도적 변화를 체계적으로 추진해 나갈 것 등을 제시했다.

마지막으로 박 박사는 “초기 한국기독교역사를 살펴보면 늘 ‘감추인 보화’ 비유가 떠오른다”며 “역사 속에서 교회와 기독교학교들이 경험한 다양한 성공과 실패의 사례를 통해 살아있는 지혜를 얻어야 한다. 그것이 역사를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전했다.

이밖에도 이날 학술대회에는 백승종 교수(마을공동체 문화연구소 대표), 임희국 교수(장신대), 강영택 교수(우석대), 한규원 교수(전 우석대) 등이 참가하여 각각 ‘초기 기독교학교에서의 지역사회와학교의 관계’, ‘초기 기독교학교에서의 서구선교사와 토착세력의 영향관계’, ‘초기 기독교학교에서의 신앙교육에 대한 연구’, ‘초기 기독교학교에서의 민족교육’이라는 주제로 발표했으며, 이후에는 토론이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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