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요환 목사
김요환 목사

안락사(安樂死, euthanasia)란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생명을 인위적으로 종결시키는 모든 행위를 의미하는 용어로서, 사망을 위한 방법과 시기를 제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연명의료중단 등 결정의 이행과 다릅니다. 다시 말해서 안락사란 불치의 중병에 걸린 등의 이유로 치료 및 생명 유지가 무의미하다고 판단되는 생물 또는 사람에 대하여 직·간접적 방법으로 생물을 고통없이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행위를 합니다. 이 안락사 문제는 베이비 붐 세대의 고령화와 함께 현재 문화에서 증가하는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안락사 문제에 대해서 성경은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요? 성경은 생명을 존중하고 소중히 합니다. 그 이유는 생명은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그 주권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살이나 안락사(자살조력) 등은 성경에 근거해서 찬성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사람이 사람의 생명을 종결하고 결정짓는 행동은 성경에 근거한 원론에만 비추어보았을 때 잘못된 행동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에서는 2009년 5월 대법원이 무의미한 연명치료 장치제거 등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린 바 있습니다. 이는 사실상 소극적 안락사를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를 포함한 많은 나라에서 적극적 안락사는 허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적극적 안락사는 차치하고서라도, 이 소극적 안락사는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봐야 할까요?

잘 알다시피 성경은 하나님이 창조주이실 뿐 아니라, “생명의 근원”이시라고 말합니다. 시편 36편 9절(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에 근거했을 때도 하나님께서는 틀림없이 생명은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행위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는 절대 해선 안 됩니다.

하지만 목회 현장과 인간 세상에는 언제나 예외적이고 특수한 상황이 닥치기 마련입니다. 또한 성경에서는 소극적 안락사를 언급하는 구절도 없고, 이에 대한 긍정도 부정도 확인할 수 없는 실정입니다. 이런 경우 성경 전반에 깔려있는 생명 존중 사상에 근거하여, 안락사에 대해 신학적이고 목회적인 통찰을 찾고자 노력할 필요성이 절실합니다.

가령 현재 환경이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죽는 것이 차라리 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경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기에서 고통은 정신적 고통이나 우울증과 같은 것이 아니라, 물리적 질병에 따른 육신의 고통을 뜻합니다. (정신적 고통이나 우울증의 문제 등은 정신적 치료가 필요하고 영적인 부분의 영역도 있기에 그런 것을 안락사와 연결하는 것은 비약일 수 있으니 논외로 합니다.)

항암치료와 같은 고통 중에 있는 수많은 사람의 입장과 여건을 생각했을 때, 이 소극적 안락사의 허용 여부 문제는 그리 단순한 문제는 아닙니다. 더군다나 죽음을 억지로 연명하는 것 역시 생명의 주권자에 대한 반항일 수 있습니다.

틀림없이 성경의 해석과 기독교의 가치는 “생명이니깐 무조건 소중해!”가 아니라 “생명이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다!”가 올바른 가치입니다. 생명이 소중한 이유는 그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질병으로 인한 극심한 고통 속에서 울고 있는 교우들이 하루속히 주님 품으로 가길 원하는 그 소망을 생명을 경시하는 태도로 폄훼하는 것은 목회적으로 대단히 옳지 않은 판단입니다. 교회의 신학은 성경을 근거로 명제적 진리를 선언하는 것과 동시에 상황을 살피고 목회적 사랑을 베풀어 성도의 마음을 읽고 보듬어주는 것도 함께해야 합니다. 따라서 안락사를 고민하는 그 심정적 측면 또한 단정적 태도로 일관하기 보단 목회적 관점에서 숙고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병이 있는 사람에게 ‘불치병을 주신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이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일단은 살면 하나님의 기적을 맛보게 될 것이다.’ 등등의 이야기를 성급하게 해선 안 됩니다. 이런 말들은 고통의 현장에 있는 이들에게 폭력적인 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질병으로 인한 육신의 고통 속에 있는 지체들은 하루빨리 천국을 소망하며 안락사를 희망하는 것은 과연 불신앙일까요? 죽음의 공포에 떨며 고통 중에도 생명을 연장하려는 것과 죽음을 받아들이고 부활을 소망하며 천국 입성을 서두르는 자 중에 누가 더 신앙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정신적 고통은 영적인 문제일 수 있기에 그것은 자살이나 안락사 등의 극단적 선택으로 가지 못하게 막고 치료를 돕는 것이 교회의 역할입니다. 그러나 물리적인 고통과 시한부 판정을 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다움의 품위를 유지하며 죽음을 맞이하길 원한다면, 그것은 성경적으로 반대할 근거가 없습니다. 실례로 어떤 성도는 임종의 상황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약물 투여로 고통받다가 병원 천장 바라보며 고통스럽게 죽고 싶지 않습니다. 예배드리고 주님 주신 시간을 소중히 쓰다가 고통 없이 안락사로 세상을 떠나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예정하시고 정하신 연수에서 더 연명하는 것보다 주어진 죽음의 상황을 의연하게 받아들이고 안락사를 선택하는 것이 어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더 절실할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인간들에게 가르쳐주시고,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당신의 백성들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나 그보다 하나님의 본성은 당신의 자녀들이 고통에서 신음하며 울고 있을 때,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위로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맛볼 수 있도록 이끌어주시길 원하십니다.

죽음이 확정된 상태에서 고통으로 생명을 연장하는 것은 인위적으로 죽음의 시간을 늘리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안락사는 죽음이 확정된 상태에서 다가올 고통을 피하고자 인위적으로 죽음의 시간을 당기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연명과 안락사 모두 하나님의 창조적이며 주권적인 원칙과는 반대됩니다. 오죽하면 안락사를 생각할까? 라는 생각으로 앞서 상황을 이해하며 접근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락사는 곧 성경적이다.’라고 주장해선 안 됩니다.

고통 속에서도 이 땅에서 어떤 복음의 목적을 위해 죽음을 미루며 연명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또 반대로, 복음의 목적을 완수하고 더 이상 남아 있는 고통으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존엄성이 훼손되기를 원치 않아 안락사를 원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소극적 안락사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이 저마다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있는데, 어쨌든지 하나님은 그 형편과 상황을 이미 다 아시고, 이들의 삶을 돌보시고 이들의 인생의 결정까지도 그 예정하심 속에서 완수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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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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