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현모 교수
류현모 교수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절대적 진리와 절대적 선의 중요성은 너무나 명백하다. 교회에서의 설교나 제자훈련의 초점은 대부분 진리와 선에 대한 것이다. 이에 반해 오늘날 아름다움은 주변적이고 중요하지 않으며 선택적인 것처럼 보인다. 아름다움은 다른 간절하고 필수적인 욕구가 많은 이 세상에서 부차적인 요소로 보일 수도 있다. 오래된 종교적 건축물들의 아름다움과, 오늘날 교회 건물을 비교하면 미에 대한 우리의 열망이 얼마나 쇠퇴했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계획에서 아름다움이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다. 성경은 아름다움이 진리나 선과 불가분의 관계임을 보여준다. 캐런 프라이어(Karen Prior)는 “진리는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며, 선은 자신을 드러내는 이유이며, 아름다움은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이다.”라고 했다. 신학자 윌리엄 더르네스(William Dyrness)는 <시각적 믿음, Visual Faith>에서 “하나님이 창세기 1장에서 피조물을 향해 사용하신 ‘좋았다’는 단어는 선함과 아름다움 모두를 가리킨다.”라고 말하며 진선미(眞善美)의 관련성을 주장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전 3:11)라는 말씀처럼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창조의 손길을 반영한다. 그분이 만드셨든, 그분의 형상대로 창조된 것이든,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끌고 있다. 하나님은 그의 보이지 않는 속성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며, 우리를 자신에게로 이끌기 위해 아름다운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모른다고 핑계할 수 없다. 하나님은 성막 건축의 세부 장식을 지시하실 때 자신이 임재하실 곳을 아름답게 장식하도록 명령하셨다. 또한 성경 자체는 이야기, 해설, 이미지, 음악성, 가르침이 뛰어난 성령의 영감을 받은 언어를 사용하여, 진리를 표현하는 다양한 문학 장르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아름다움은 다양한 예술작품들에 미친 영향으로 증명된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름다움의 근원이라는 믿음을 변호하려면 사려 깊은 대응이 필요하다. 보통 아름다움을 정의하라는 질문을 받을 때 성경이 아니라 플라톤의 정의를 따르는 경향이 있다. 플라톤은 <향연, The Symposium>에서 아름다움을 이 지상에서 볼 수 없는 조화 또는 비율이라 정의했다. 이는 성 어거스틴을 비롯한 초대교회 교부들에 영향을 미쳤고, 그 영향을 받은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에서 아름다움이란 완전성, 비율(조화), 명료성의 세 조건을 갖춰야 한다고 정의한다. 즉 기독교의 미의 개념에 플라톤적 요소가 영향을 미친 것이다.

포스트모던 시대인 오늘날은 미에 대한 관념이 매우 주관적이 되었다. “당신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다.”라는 상대주의적 주장을 생각해 보라. 어떤 사람은 감자를 좋아하지만 다른 사람은 좋아하지 않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아름다움을 개인의 취향 문제로 변질시켜. 미의 절대적 기준을 해체해 버린다. 성경적 혹은 고전적 아름다움의 정의를 버리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면서 심지어 변기나 하수구의 내용물이 캔버스에 등장하기도 한다. 시끄러운 소음, 괴성, 불협화음, 심지어 욕설마저 음악의 내용으로 등장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리스도인들 특히 그리스도인 예술가들은 미의 정의가 시대에 따라 변하기 때문에 아름다움이 하나님을 가리킨다는 성경적 믿음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경의 계시에 비추어 아름다움의 개념을 재정비하고 확장해야 한다. 웨스트민스트 신학교의 변증학 교수 윌리엄 애드가는 예술을 정의할 때; 1) 일반인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숨겨진 아름다움, 즉 자연의 어떤 부분, 삶의 희노애락, 하나님의 거룩함 등을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며, 2) 그 표현의 기술이 잘 훈련되고 세련되어야 하며, 특히 3) 아름다움의 내용이 진리와 일치해야 한다는 세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아름다움의 정의에 대해 성경적으로 충실하다는 것은 삶의 다른 부분에서와 같이 예술에서도 창조, 타락, 구속, 완성에 대한 성경의 메타네러티브를 전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우리를 종교적 예술에만 국한시키려는 것은 아니다. 예술가가 창조의 영광만을 표현하고, 타락의 불행을 무시한다면 정직하지 못한 것이며, 반대로 작품이 악과 불행만 묘사한다면 소망이 결여된 것이다.

아름다움은 본질적으로 육체적 감각을 통해 육체적으로 지각되는 것이다. 육적인 것보다 영적인 것을 더 높이 평가하는 플라톤의 이원론적 영향을 받은 사람은 감각적 경험이 자신의 형성과 세상 이해에 끼치는 영향을 무시해 버릴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광을 말할 때 그리스도의 탄생, 삶, 죽음의 아름다움과 위엄을 가리킨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요 1:14)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복음은 완벽한 진선미를 모두 갖춘 하나의 큰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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