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호 목사
박진호 목사

13절 [우리는 -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 같이 아니하노라.] 바울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사도들은 모세처럼 하지 않는다고 즉, 모세 수건 사건과 다르게 혹은 반대로 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럼 모세가 수건을 써야만 했던 이유가 있었으나 신약에선 그 이유가 제거되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본문 안에서 그 이유를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라고 설명합니다. 모세가 수건을 가렸던 대상은 장차 없어지므로 백성들로 그것을 보지 않게 하려는 목적이었다고 말합니다.

출애굽 때 시내산에서 모세가 하나님께 율법을 받아서 수여 받고 내려올 때 얼굴에 광채가 나서 백성들이 가까이하기를 두려워했으나 모세가 부르자 곁으로 왔고 모세는 율법을 전했습니다.(출34:29-32) 그리고 말하기를 마치고 자기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고 그 후로도 하나님께 말씀을 받고 전할 때마다 백성들이 그 광채를 보게 되므로 다시 수건을 가리는 일을 되풀이했습니다. (33-35절)

그럼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은 일차적으로는 모세 얼굴의 광채인데 백성들의 두려움 때문만은 아닙니다. 물론 백성들에겐 모세 얼굴의 광채가 하나님의 영광으로 인식되니까 그분을 직접 만나면 죽는다는 인식 때문에 계속 두려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에 모세가 수건을 가리지 않는 상태인데도 그에게 가까이 와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자기 얼굴의 광채를 가려서 백성들의 두려움을 완전히 없애주려는 뜻도 있었지만, 더 중요하게는 백성들이 자기가 전한 율법에는 주목하지 않고 자꾸 그 광채에만 주목할 것을 염려해서 수건을 가린 것입니다. 모세로선 백성들이 율법을 정확히 배워서 삶에서 온전히 실천하게 하려는 뜻이었습니다.

이제 그 사건을 바울이 인용하면서 “장차 없어질 결국”을 보지 못하게 수건을 가렸다고 해석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율법을 받을 때만 광채가 생겼으니 바울이 말하는 장차 없어질 것은 율법과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특별히 죄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정결법과 제사법을 상징합니다.(히9:9-10)

그럼 모세는 율법에 주목하게 하려고 수건을 가렸는데도 바울은 모세의 뜻과는 반대로 그것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 했다고 거꾸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모세의 당시 의도를 틀렸다고 해석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신구약 시대 전체를 아우르며 이스라엘의 역사를 이끌어 오신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차원에서 살펴보면 율법으로는 죄 사함을 받을 수 없기에 율법은 결국 없어질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당시 모세로선 장차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 복음으로 구원의 은혜를 베푸실 줄은 몰랐습니다. 가나안 땅에 입경한 후에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나라를 세워서 그분의 뜻에 순종하게 하는 데만 주력했습니다. 그러니까 백성들로 율법에 주목하게 하려고 수건으로 광채를 가렸습니다.

바울이 모세의 수건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그렇게 해석한 이유는 지금 자기가 말하려고 하는 주제를 강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주제는 바로 율법은 때가 되면, 모세 얼굴의 광채도 사라졌듯이, 그 역할을 다하고 십자가 복음으로 대체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은 절대로 약해지지도 없어지지도 않으니까 즉, “장차 없어질 결국”이 아니니까 사도들이 굳이 수건으로 가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영원하고도 절대적 진리로 선포되어야 하며 그것을 순전히 믿는 자는 마찬가지로 취소되지 않는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모세처럼 굳이 수건을 가리지 않아도 된다고 상징적의 의미로 말한 것입니다.

문제는 당시의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14절) 그들은 이스라엘의 후손 즉, 신약 시대의 유대인들입니다. 모세의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졌는데도 아직도 구약을 읽을 때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게 하려는 목적이지 그것을 지키면 구원을 주시겠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논리적으로는 율법을 하나도 어기지 않고 온전히 지킬 수 있다면 구원을 얻겠지만 실제로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 예수님의 조건 없는 긍휼만이 죄인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며 율법은 죄의 저주 아래로 이끕니다. 그래서 바울은 앞에서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라”(고후3:6)고 전제한 것입니다.

백성들은 출애굽 때도 신약 시대에도 실제로 수건을 쓴 적이 없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수건이 벗겨지지 않았고(14절) 또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다고 했습니다.(15절) 결국 유대인들의 마음에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막는 이유와 고집들을 수건으로 상징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수건은 주께로 돌아가면 또 주의 영을 받아서 자유롭게 되면 수건을 벗게 된다고 한 것입니다. (참고로 14절에서 수건이 모세의 것처럼 표현된 것은 백성들이 모세가 수건으로 가린 이유를 몰랐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이어서 15절이 그런 의미라고 보충 설명해주었습니다.)

그럼 유대인들이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까닭은 무엇입니까? 자기들은 이미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받았고, 거룩한 율법을 수여 받아 소지하고 있고, 율법대로 동물 희생 제사를 열심히 드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로 예수를 믿을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서신을 저작한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대면하여 성령으로 새 사람으로 거듭나기 전의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들이 복음을 전해도 그런 완고한 고집(수건)이 마음을 덮고 있으니까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 대적한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도 예수님의 은혜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할례를 비롯한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거짓 선생이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런 유대주의자들에게 단호하고도 신랄하게 경고했습니다. (갈1:6-10)

유대인들은(십자가 이전의 제자들도 포함하여서) 이미 구원받은 백성이라서 예수님에게 로마를 물리치고 현실적으로 다윗 왕국의 영광을 재현해주기만 바랐습니다. 그 기대가 무너지자 주님을 향한 열렬한 환호가 극렬한 저주로 바뀌어서 십자가에 매단 것입니다. 또 그런 기대를 아직도 완고하게 고집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말대로 이스라엘의 후손들은 여전히 신약은 인정하지 않고 구약을 읽을 때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열방들 위에 최고로 높여 줄 자기들만의 메시아가 시온 성전에 나타날 것을 바라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수건을 가린 이유와 그것을 바울이 복음에 비추어서 해석한 뜻을 정확히 모르기 때문입니다.

2022/12/20

* 이 글은 미국 남침례교단 소속 박진호 목사(멤피스커비우즈한인교회 담임)가 그의 웹페이지(www.whyjesusonly.com)에 올린 것을 필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입니다. 맨 아래 숫자는 글이 박 목사의 웹페이지에 공개된 날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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