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비용을 계산해” 보라고 경고하셨다. 이런 말씀과 같다. “잘 들어라. 네가 허락한다면 나는 너를 온전하게 할 것이다. 너 자신을 내 손에 맡기는 순간 너는 거기에 뛰어든 것이다. 그 이하도 아니고 다른 무엇도 아니다. 네게 자유 의지가 있으니 원한다면 나를 밀어내도 된다. 그러나 밀어내지 않을 거라면 알아 두어라. 나는 이 일을 반드시 이룬다. 현세에 네게 어떤 고난이 따르더라도 나는 쉬지 않을 것이고, 죽은 후에 네가 생각지도 못한 정화를 통과해야 한다 해도 너를 쉬게 하지 않을 것이다. 내게 어떤 대가가 따르더라도 마침내 너를 그야말로 온전하게 할 것이다. 나를 기뻐한다고 말씀하신 아버지께서 또한 너를 기뻐한다고 주저 없이 말씀하실 때까지 말이다. 나는 능히 그렇게 할 수 있고 반드시 할 것이다. 그 이하로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다른 측면이 있다. 예수님은 궁극적으로 당신이 철저히 온전해지지 않는 한 결코 만족하지 않으시지만, 지극히 단순한 의무를 행하려 당신이 내일 내딛는 미약하고 서투른 첫 시도 역시 기뻐하신다는 것이다.
C.S. 루이스 – 부활의 자리로
현실과 동떨어진, 고유하고 구체적인 삶은 무시한 채 일반화에 집착하는 태도는 예언자적 사유와는 거리가 멀다. 예언자의 언어는 결코 구체적인 삶, 역사적 상황과 유리되지 않는다. 시대를 초월한 추상적인 메시지라는 것은 없다. 그것은 언제나 구체적인 현실의 상황을 가리킨다. 보편은 특수 안에 주어지고 구체적인 것들 속에서 드러나며, 구체적 현실이 추상적인 진리를 입증한다. 이 말은 유대교가 철학을 사건에 종속시키거나 영원한 진리를 특정 역사적 사건 안에 가둔다는 의미는 아니다. 유대교는 ‘사건’이 거룩한 율법을 드러내고, 진리가 ‘역사’ 안에서 성취되는 차원, 그러한 실재의 차원을 가리키고자 한다. 신앙은 삶의 신비를 느끼고, 경이와 놀라움 혹은 두려움을 느끼는 데서 기인하지 않는다. 신앙은 그 마음, 그 신비와 경이와 두려움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어떻게 그 모두와 만날 것인지를 묻는 데서 시작된다. 그 신비 속에 홀로 남겨진 고립 상태를 벗어나 그 경이로움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고 있음을 지각하는 지점이 우리의 출발이다. 그 물음은 우리의 영혼을 긴장시키고 우리를 사로잡는다. 그 물음은 인간 편에서의 응답을 요청한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 - 예언자의 말들
구속의 첫째 의미는 "갚읍 이다. 예수님은 아담이 실패한 삶을 대신해 의로운 삶을 사셨고, 자신의 생애 전체를 아버지께 선물로 드리셨다. 십자가에서 자신을 제물로 드리시고, 우리를 덮어 저주와 심판을 감당하셨다. 그분의 삶과 죽음, 부활과 승천은 믿는 자에게 생명과 의의 선물이 되었다. 주님의 피뿐 아니라 주님의 공의와 순종도 우리에게 전가되었다. 구속의 둘째 의미는 "대치"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종결하고 그리스도로 대치하신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2:20에서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 선언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이제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사신다.
김동주 - 창세기에서 만나는 그리스도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