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문화적 측면
소셜 미디어의 발달은 많은 사람에게 정보에 대한 공평한 접근을 용이하게 했고, 기존의 레거시 미디어 이외의 다양한 의견들이 사회적 공론장에 표출되도록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알고리즘을 통한 확증편향, 가짜 뉴스의 전달과 확산은 가상공간에서 양극화를 부추기는 것은 물론, 현실 세계에서 갈등과 대립을 심화시켰다. 문화적 측면에서 정부와 언론의 대응책을 언급한 후, 교회의 역할을 제언하고자 한다. 정부는 통신사업자, 정보통신 서비스 제공자 등에게 모니터링 의무를 부여하는 등 법적 제도적 장치를 모색하고, 사회적 차원에서도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을 강화해야 할 것이다. 허위의 사실을 인지하고도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상습적으로 가짜 뉴스를 가공, 유포하는 개인이나 기관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처벌하는 입법 정비도 시급하다. 온라인 플랫폼은 알고리즘의 작동 방식을 공개하고, 사용자에게 정반대의 의견도 노출함으로써 비판적 숙의와 균형 있는 시각을 갖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언론은 ‘팩트체크’를 통해 정확하고 객관적인 정보를 전달함으로써 다양한 의견이 충돌하고 소통하는 공론장을 형성하고, 보편 정의와 윤리적 관점에서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고, 정부, 기업, 사회의 권력 감시자(watchdog)로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
교회는 가장 기초적이고 필수적인 수준에서라도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을 성도들에게 해야 한다. 오늘날 교회 내 단톡방이나, 목회자, 신학생, 선교사들의 채팅방은 가짜 뉴스의 전달과 확산에 매우 취약하다. 한 사람의 확인도 없이 올린 가짜 뉴스로 단톡방은 진흙탕 싸움이 벌어지거나, 그것을 견디다 못한 사람들은 방을 나가버려 단톡방이 해체되기도 한다. 이제 교회는 성경적 진리를 디지털 환경에서 어떻게 분별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 지침을 주어야 한다.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은 단순한 기술 훈련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시민으로서의 공적 책임을 훈련하는 제자도의 일부다. 이를 통해 미디어를 비판적으로 이해하고, 분석하며, 평가하고, 생산하는 능력을 성도들에게 길러주어야 한다. 그럴 때, 성도들은 가짜 뉴스에 부화뇌동하거나 일희일비하지 않고, 양심과 성경적 가치관을 따라 사안을 판단하고 결정하는 성숙한 시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교회의 공공성과 사회적 신뢰를 회복하는 길이기도 하다.
아울러 기독교 신문이나, 교단 신문은 보편적으로 요구되는 언론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 동시에 사회적 현안에 대해 성경적 가치와 객관적 사실을 토대로 올바른 관점을 제시하는 오피니언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다 그런 것은 아닐 테지만, 모 교단 신문은 총회장 선거를 앞두고 금권선거의 온상이 되어 독자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한국 개신교 신문들 가운데, 신문사의 지도부, 권력층, 주주의 신학적‧정치적‧사회적 입맛에 맞게 기사의 논조가 뒤바뀌고 자신의 정적을 제거‧대항하는 무기로 언론이 활용되고 있다. 교회가 세상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 세상보다 더 엄격한 기준과 잣대로 자신을 성찰하며 절제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럴 때, 교회는 갈라진 세상을 향해 화해의 중재자로 나설 수 있다. 또, 세상은 교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아브라함 카이퍼가 일간지인 ‘데 슈탄드르트’(De Standaard)와 주간지 ‘데 헤라우트’(De Heraut)를 통해 국민과 시대적 현안을 꾸준히 소통한 것은 하나의 좋은 사례가 될 수 있다.
4) 역사적·정치적 측면
한국 사회는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이라는 역사적 경험을 거치며 이념 논쟁에 노출되었다. 교회는 그 상처를 어루만지고 갈등을 치유하는 화해자의 자리에 서기보다, 오히려 이념 논쟁에 휘말려 갈등을 심화시킨 면이 없지 않다. 이미 일어난 역사를 바꿀 수는 없는 상황에서 교회는 역사적, 정치적 측면에서 양극화 해결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첫째, 교회는 신칼빈주의의 정치 변혁과 교회의 정치화를 구분해야 한다. 신칼빈주의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 안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적 통치를 모든 영역에서 구현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는 특정 문화 코드나 정치 이데올로기를 신정적(神政的) 이상(理想)으로 강제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죄로 인해 왜곡된 세상을 복음의 빛으로 비판하고 갱신하는 변혁적 참여와 예언자적 사명을 요청한다 따라서 목회자가 강단이나 공식 석상에서 특정 정당을 지지하거나, 특정 후보에 대한 투표를 독려하거나, 대통령에 대한 안수기도를 시행하는 것은 재고되어야 한다. 일부 보수교회에서 아브라함 카이퍼의 영역주권을 잘못 이해하여 교회가 정치집회에 동원되거나, 특정 정치 이념(반공, 애국, 자유)을 하나님의 뜻으로 절대화하는 것은 카이퍼의 원래 뜻과는 반대이다. 카이퍼는 국가의 교회에 대한 지배를 반대하며, 사회 각각의 영역은 하나님 앞에서 고유한 역할과 질서를 가지며, 한 영역이 다른 영역을 침범하거나 지배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카이퍼의 영역주권은 교회와 정치의 분리를 전제한다. 교회는 자신의 영역에서 주권적이지만, 그 영역 바깥에 살고 있는 자들에게는 아무 힘이 없다. 교회가 특정 이념의 포로가 되어 복음이 특정 정치 진영의 언어로 바뀔 때 복음은 힘을 잃고, 세상 사람들에게 신뢰를 잃게 된다. 교회는 정치 이데올로기 우상의 노예가 되어 사회에 영향을 미치려는 시도를 멈추어야 한다. 건전한 신학적 성찰과 복음적 가치를 가르치되 정치참여는 신자 개인의 양심에 맡겨야 한다.
둘째, 교회는 신자들을 복음과 양심에 따라 사유하고 판단할 수 있는 ‘신 앞에 선 단독자’로 키워야 한다. 한나 아렌트는 유대인 대량 학살을 저지른 나치 치하의 루돌프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을 지켜보며,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 사유하지 않을 때 얼마나 끔찍한 죄를 범하는지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그의 말을 오랫동안 들으면 들을수록, 그의 말하는 데 무능력함(inability to speak)은 그의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inability to think)과 매우 깊이 연관되어 있음이 점점 더 분명해진다. 그와는 어떠한 소통도 가능하지 않았다.” 오늘날 스마트폰 기반 문화가 급속도로 확산하면서 가상공간 안에는 어떠한 성찰이나 신뢰나 도덕적 가치 공유도 자리 잡기 어렵다. 손가락의 움직임만으로 자신의 취향에 맞는 콘텐츠를 선택하고, 소셜 미디어가 사용자에 최적화된 콘텐츠를 제공함으로써 확증편향은 깊어지고 집단 착각은 굳어진다. 그리스도인도 예외는 아니다. 스스로 분별할 기준과 사유하는 힘이 없을 때, 사람들은 카리스마 있는 종교 지도자나 영향력 있는 정치인에게 쉽게 의존하게 된다. 전달받은 정보를 성경적 기준을 근거로 판단하기는커녕, 기본적인 사실 확인조차 없이 퍼 나르는 과정에서 개인은 물론, 교회와 사회 전체에 양극화로 병든다.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진정한 신자는 군중 속 익명성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홀로 존재하는 고독한 결단을 통해 형성된다고 말한다. 그는 “신앙은 군중 속에 있을 때 생기지 않는다. 오히려 군중은 비진리를 낳는다”고 강하게 비판하며, 각 개인이 하나님과의 직접적 관계 속에서 책임지고 결단하는 ‘단독자’로 살아야 함을 강조했다. 교회는 바른 신앙과 신학에 기초하여 사회 현안을 분별하고 판단하여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신 앞에 선 단독자’를 키워내는 데 힘써야 한다. 그럴 때 학연, 지연, 종교, 이념, 진영에 따라 우르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사유하는 그리스도인이자 책임있는 시민으로 서게 될 것이다. 그것이 양극화 해소의 완전한 해결책은 아니더라도 필수적인 출발인 것은 분명하다.
5. 결론
본 논문은 한국 사회 양극화의 원인을 네 가지 측면에서 살피고, 그에 대한 대안과 교회의 역할을 역시 네 가지로 제시하였다. 첫째, 경제적 불평등이 사회 양극화의 구조적 토대를 형성했고, 둘째, 사회적 불안과 두려움이 자신에게 소속감과 안정감을 제공하는 정치적 부족주의나 정체성 정치를 낳았다. 셋째, 문화적으로 소셜 미디어의 발달과 알고리즘은 확증편향을 촉발하여 양극화를 부추겼고, 넷째, 역사적으로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은 한국 사회를 오랫동안 이념 논쟁 안에 가두어 두었다. 연구자는 사회적 갈등과 양극화의 전 지구적 현상에 주목하며 보편적으로 관측되는 양극화의 원인을 추출하고자 하였다(처음 세 원인). 또한 한국 사회가 겪은 역사적 경험이 작금의 양극화와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네 번째 원인에서 다루었다.
양극화의 대안으로 네 가지 측면에서 서술했지만, 각 원인에 상응하는 대안이 아니라 한국교회의 역할을 중심으로 논의하였다. 첫째, 정부 정책이 닿을 수 없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의 마음을 말씀으로 위로하고 훈련할 것, 목회자를 비롯한 모든 신자가 탐욕을 거부하고 검소와 성결을 추구할 것, 한국교회가 비교적 잘하고 있지만 지자체와 협의하여 가난하고 소외된 자를 돌아보아야 한다. 둘째, 작은 교회와 소그룹을 통해 갈라진 관계를 잇는 영적 가족이 될 것, 보수와 진보라는 진영 논리에서 벗어나 복음의 공통 분모로 서로를 품는 하나님 나라를 회복해야 한다. 셋째, 노회나 총회 차원의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으로 가짜 뉴스를 근절하고, 기독교 언론들이 정치적 중립에 서서 오피니언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신칼빈주의적 정치 변혁과 교회의 정치화를 구분할 것, 성도를 스스로 사유하고 판단할 수 있는 시민으로 양성할 것을 제언하였다.
어쩌면 한국교회는 한국 사회의 축소판인지도 모른다. 경제적으로는 대형교회와 중소형 또는 개척교회가 나뉘어 있다. 사회적으로 장년 세대와 청소년 세대 간의 단절이 심각하다. 문화적으로는 각종 미디어나 최신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교회와 그것을 거부하고 죄악시까지 하는 교회도 있다. 정치적으로는 진보와 보수 갈등이 가장 심한 곳 중 하나가 교회이다. 글을 맺으며 한국 사회의 양극화 회복은 한국교회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부담과 교회가 먼저 시작한다면 한국 사회도 가능하겠다는 소망이 중첩된다. 양극화라는 거대 담론을 다루었기에 각 주제별 원인 분석과 대안 제시가 자칫 피상적이라는 한계를 면키 어렵다. 추상적이고 공허한 탁상공론이 되지 않도록 통계 자료와 현장 보도를 최대한 활용하여 지역 교회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고자 힘썼으나 연구자의 일천한 역량으로 아쉬움도 있다. 본 논문에서 제시한 주제들에 대해 향후 지속적인 연구를 통해 한국교회를 새롭게 하고, 한국 사회를 회복하는 건설적인 대안들이 제시되길 기대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