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양극화의 대안과 교회의 역할
지금까지 한국 사회 양극화의 원인을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역사적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경제·사회·문화적 원인은 한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관측되는 바 본 연구의 객관적 근거와 신뢰도를 더해준다. 이제 그 대안에 대해 모색해 보도록 하자. 앞서 제시한 양극화 문제점들에 대하여 일일이 대응책을 논의하는 것은 이 글의 논지를 벗어날 뿐 아니라 한국교회의 역할이라는 본 고의 취지에도 맞지 않다. 기본적 차원에서 각 영역별로 간략한 대응책을 소개한 뒤, 한국교회의 역할에 초점을 맞추어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1) 경제적 측면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정책적 대안으로는 여러 가지가 논의될 수 있을 것이다. 누진세를 통한 소득 재분배는 불평등 심화에 어느 정도 제동을 걸 수 있다. 기본 소득, 의료, 교육, 주거 등 복지제도는 소득 격차를 완충함으로써 사회적 기회균등을 도모할 수 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노동시장의 고질적인 이중구조는 최저임금제,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으로 격차를 좁히고, 사회적 산재보험으로 저소득층에 대한 안전장치를 마련할 수 있다. 요점은 시장에 모든 걸 맡길 때 경제적 불평등은 사회적 양극화를 초래하므로, 정부의 신중한 정책적 개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복지정책이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포퓰리즘을 부추겨서는 곤란하다. 진보 측의 핵심 가치인 분배는 보수 측의 핵심 가치인 성장이 있을 때 건강한 선순환이 가능하다. 그렇지 않으면 국고는 바닥나거나 과도한 부채를 떠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빈곤층에게 재정지원을 넘어서 자립을 도와야 한다. 한부모 가정 정부지원금을 받기 위해 배우자에게 이혼을 요구하는 사례는 정부의 복지가 모든 걸 해결할 수 없음을 방증하는 동시에, 교회가 기여할 수 있는 틈을 보여준다.
교회가 빈곤 문제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구제를 모두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것이 교회의 본질적 사명도 아니라면 교회는 경제적 불평등 앞에서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까? 첫째, 말씀을 통해 교회는 정부의 정책이 닿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훈련해야 한다. 재정지원이 수급자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 수도 있고, 자립심을 약하게 할 수도 있다. 반대로 기부자는 공감과 긍휼 없이 물질만 기부할 수 있다. 월터 부르그만의 지적대로 목회자는 교회가 사회적 불평등과 구조적 악을 함께 슬퍼하며 비판하는 동시에 구속사적 내러티브에 기초하여 새로운 세상을 꿈꾸도록 예언자적 상상력을 제공해야 한다.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포섭된 설교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가치가 경제적 불평등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통해 충만해지고, 종말론적 소망 가운데 회복될 수 있음을 성도들은 들어야 한다. 초대교회에서 도무지 함께하기 어려운 이질 집단인 주인과 노예, 간수와 죄수,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공동체가 된 것이 현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복음인 것을 들어야 한다. 가난한 자를 차별하지 말라는 말씀(약 2:1-9)과,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마 25:40)이라는 가르침이 단순한 윤리 강령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의롭게 된 자에게 나타난 열매라고 칭의와 성화를 균형있게 들어야 한다. 바빙크가 『개혁파 윤리학』의 내용을 ‘1부 회심 이전의 인간’과 ‘2부 회심한 인간’으로 구분한 것은 개혁파 윤리학의 기초가 도덕적 수행이 아니라, 회심한 자에게 주어진 하나님 사랑과 성령의 역사임을 선명하게 드러낸 것이다. 교회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인 한 영혼을 세우고,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건강한 시민을 방출해야 한다.
둘째, 목회자를 포함하여 그리스도인이 먼저 검소와 성결을 추구해야 한다[소극적]. 초대교회는 탐욕을 거부하고 자발적 포기와 나눔을 실천하였다. 성도들의 이러한 미덕은 사회에 선한 영향을 미쳤고, 온 백성에게 칭찬받는 계기가 되었다. 오늘날 교회의 모습은 어떠한가? 리처드 핼버슨은 “교회는 그리스로 이동해 철학이 되었고, 로마로 옮겨가서는 제도가 되었다. 이후 유럽으로 가서 문화가 되었고, 마침내 미국으로 왔을 때 교회는 기업이 되었다”고 언급한 바 있다. 탐욕에 저항하고 거부하는 행동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제자가 고수할 최적화된 방식이다. 교회가 세상에서 공공신학적 역할을 하려면, 먼저 교회 속으로 들어온 세속적 가치인 이기심, 기득권, 맘몬주의에서 해독되어야 한다. 아담 스미스는 『국부론』(1776)에서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는 자유시장경제를 주창했지만, 그보다 17년 전에 『도덕 감정론』(1759)을 통해 동감, 소통, 존중, 자기 통제 등 공동체적 덕성을 강조하였다. 국부론의 시장경제는 이러한 덕성을 갖춘 시민사회를 전제로 한다. 스코틀랜드 도덕철학자인 스미스가 거듭난 그리스도인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의 저술은 교회가 사회에 어떤 시민을 키워내야 할지 시사점을 준다.
셋째, 교회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더욱 환대해야 한다[적극적]. 로드니 스타크는 『기독교의 발흥』에서 초대 기독교 300년 동안 교회가 세상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사회학적 관점에서 추적하였다. AD 165년과 251년에 발생한 역병은 로마제국 인구의 3분의 1 내지 4분의 1을 앗아갔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시대 기독교 인구는 오히려 증가했다. 이유는 모든 사람이 역병을 피해 도망갈 때, 기독교인들은 병자들을 헌신적으로 돌봄으로써 면역력이 생겨나 생존율이 증가한 것이다. 전쟁과 화재, 역병과 기근으로 기존의 애착 관계를 상실한 세상에 교회는 환대 공동체가 되어 활력을 제공했다. 사실 개신교인들이 타 종교에 비해 기부와 후원을 많이 하는 편이다. 대형교회가 미자립교회를 돕는 것을 물론, 노숙자를 위한 사랑의 급식소 운영, 탈북자 지원, 외국인 근로자 법률상담과 지원, 무료 한글 교실 등 비교적 한국교회가 잘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경제적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필요는 더욱 절박하다. 월세와 공과금을 남기고 생을 마감한 송파 세 모녀 사건이 2014년도에 있었다. 그 사건이 지나고 세상은 얼마나 따뜻해졌을까? 그로부터 8년 뒤인 2022년, 생활고를 비관해 극단적 선택을 한 수원 세 모녀 사건이 마치 데자뷔처럼 되풀이되었다. 교회가 줄었다지만 전국의 시, 군, 구, 동마다 교회가 있다면, 지자체와 연계하여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을 실질적으로 도울 수 있을 것이다. 25년 2월 기준 1인 가구는 천만을 넘어섰다. 이들은 사회적 고립과 경제적 불안을 겪고 있다. 이전에는 고독사(孤獨死)가 노년층에게서 발견되었다면, 이제 청년층에게서도 늘고 있다. 오늘날 교회의 역할이 더욱 요구되는 상황이다.
2) 사회적 측면: 소그룹과 복음의 공통 분모
한국 사회에 깊이 자리한 이념 간, 빈부 간, 세대 간, 계층 간 갈등을 교회는 어떻게 해소하고 화해의 중재자가 될 수 있을까? 첫째, 누구나 존중받고, 어떤 이야기든 수용될 수 있는 안전한 소그룹이 많아져야 한다. 소그룹은 세포와 같아서 거기에 속한 구성원에게 생명력을 준다. 또 세포가 분열되듯 성장하고 번식한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개인주의는 고립, 우울증, 반사회적 범죄 등 다양한 사회 문제를 파생한다. 누군가와 연결되고 싶은 현대인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기업들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 영혼 없는 공감과 칭찬을 팔아 막대한 수익을 올린다. 교회는 역동적인 소그룹을 통해 고독과 절망의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어야 한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어주고,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는 친구가 되어 주어야 한다. 건강한 작은 교회와 상호 섬김의 소그룹 공동체는 양극화로 단절된 사람들을 보듬는 영적인 가족이 될 수 있다.
둘째, 교회는 분열의 논리에서 벗어나,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중받을 수 있다고 ‘복음의 공통 분모’를 선포해야 한다. 참된 복음은 나와 다른 출신, 지역, 성별, 학력, 계층, 정치적 입장을 초월하여 형제로 묶고, 심지어 원수까지 사랑하는 능력이 된다. 세리든 창녀든, 어떤 죄인도 용서받을 수 있는 교회 안에서 단지 자신의 외적인 요건 때문에 용납되지 못한다면, 과연 어디에서 그 사람이 환대받을 수 있겠는가? 예수님은 전통적 가치를 옹호하고, 구약의 율법을 완성하신 점에서 보수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과 탐욕을 책망하고, 세리와 창녀와 열심당원과도 어울린 진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당대의 보수적 율법주의자처럼 차별하거나 혐오하지 않으셨고, 진보적 열심당원들처럼 정의의 이름으로 증오하지도 않으셨다. 보수는 그분에게서 진보를 보았고, 진보는 그분에게서 보수를 보았다. 그들은 모두 그분에게서 복음을 보았다.
교회는 진영 논리가 아니라 ‘복음의 안목’을 제시해야 한다. 보수와 진보는 복음과 하나님 나라의 일부를 반영할 수는 있지만, 전체를 규정할 수는 없다. 복음은 양 진영 모두에게 회개를 촉구하며, 동시에 화해로 초대한다. 동성애가 죄라면, 교회 세습도, 목회자의 횡령과 성추행도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 교회 세습과 목회자의 타락이 죄라면, 동성애도 죄라고 해야 한다. 복음은 이념으로 나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전인격과 사역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온전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복음의 공통 분모’는 단지 관용이나 중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다. 그것은 상대를 정치적 적대자가 아니라, 연민과 긍휼의 대상으로 다시 보게 한다. 오늘날의 맥락으로 보면, 극우와 극좌, 보수와 진보, 친미와 친중, 혹은 성별, 세대, 지역, 직업의 차이로 나뉜 사람들이 함께 복음이 공통 분모 안에서 식탁을 나누는 일이다. 교회는 이러한 급진적 불편함을 감수하고 하나님 나라를 앞당겨 연습하는 훈련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복음은 보수와 진보를 아우른다. 하나님 나라라는 더 크고 높은 가치로 사람들을 불러낸다. 십자가는 나의 비참과 하나님의 용서를 깨닫게 하여 상대를 향해 혐오가 아닌 긍휼로, 분열이 아닌 화해로 다가서게 한다. 교회는 이 복음의 공통 분모 위에서 세상에 선지자적 외침을 감당하는 동시에, 그들의 죄를 나의 죄로 자복하는 제사장적 기도를 드려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선포하되, 이를 한 진영의 언어로 환원하지 않고, 양쪽을 향해 회개와 화해의 복음을 증언하는 증인공동체요, 모두를 품는 환대공동체요, 세상에 대안을 제시하는 대안공동체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