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 '신학 단상' 은 평신도들의 신학적 소양 함양을 위해 국내 신학자 및 목회자들의 발제문을 뽑아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지난 2월에 열린 한국실천신학회 제20회 정기총회 및 제55회 정기학술대회에서 발표된 신학자들의 논문을 일부 연재합니다. 첫 순서로 이화여자대학교 윤은주 박사의 '한국사회의 융합과 통섭' 관련 논문을 게재합니다. <편집자주>

▲윤은주 박사ㅣ이화여자대학교

I. 들어가는 말

본 논문의 목적은 한국교회의 통일선교가 인권운동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점을 역사적으로 설명하고 인권운동과 통일선교의 관련성을 규명하는데 있다. 또한 남쪽의 인권운동으로부터 시작된 통일선교가 북쪽의 인권운동과는 어떻게 연결되는지도 설명하고자 한다. 한국교회의 통일선교는 안보담론이 지배적인 가운데 민간차원에서는 통일에 대한 논의조차 수월하지 않았던 상황에서 반공이데올로기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하며 시작되었다. 우리 사회 속에서 작동하고 있는 반공주의가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어떤 기능을 해왔는지 비판적으로 점검하게 되면서 통일에 대한 관심을 키웠던 것이다. 그 바탕에는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교회의 역할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선교신학과 구체적인 실천현장으로부터의 축적된 경험이 있었다. 반공의 보루로 여겨질 만큼 철저한 반공주의를 기반으로 성장한 한국교회가 스스로 이념적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다시 한 번 조명하고자 하는 것은 통일선교의 의의를 되짚어보기 위함이다. 특히 북한 인권 문제를 놓고 교회 내에서 의견이 분분할 뿐만 아니라 다시금 반공주의를 기준으로 이념대결을 펼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반공주의의 역기능을 극복하고 민족화해를 추구하고자 시작되었던 통일선교는 궁극적으로 한반도 전체에서의 인권 실현을 목적으로 한다고 할 수 있다. 통일을 추구하며 이루어지는 인권운동은 한반도 분단구조의 특성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북한인권운동에 있어서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하겠는데 본 연구에서는 남북한 인권운동에 있어서 구조적 제약을 규명함과 동시에 인권과 통일의 상호관련성을 점검해보고자 한다.

II. 펴는 글

1. 한국교회의 인권운동

1) 인권과 민주화
한국교회가 노동자와 도시빈민 등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인권운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게 된 배경에는 국제선교대회를 통해 등장했던 진보적 선교개념들의 영향이 크게 작용했다. 그중 '하나님의 선교', '인간화', 그리고 '오늘의 구원' 등의 선교개념은 인간의 구원을 위한 선교가 보편적 인권실현을 위한 사회적 운동으로 전개될 수 있는 신학적 근거를 제시해주었다. 한편 급속한 산업화, 도시화 정책이 추진되는 상황에서 이농인구가 도심 주변으로 몰리자 많은 교회들이 포교를 목적으로 인구 집중 지역을 찾아다니면서 도시선교회활동을 하였는데 이 또한 영향을 미쳤다. 노동자의 인권문제가 본격적으로 다루어지기 이전 교단차원에서는 1957년 4월 13일 예수교장로회(통합)(이하 예장통합) 총회에서 산업전도위원회를 설치한 이후 1961년에는 기독교대한감리회(이하 기감)와 대한성공회가, 1963년에는 기독교장로회(이하 기장)가, 그리고 1965년에는 구세군 등 각 교단들이 산업전도활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초창기의 산업전도는 사용자나 관리자, 노동자 구분 없이 이루어졌는데 공장 내 전도지 배부나 예배, 봉사활동, 상담 등 주로 종교 활동을 지원하는 내용으로 다분히 보수적 선교관에 따른 활동이었다.

노동자와 도시빈민들의 삶의 문제가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교회의 선교적 과제로 인식되면서 동시에 인권운동의 과제로 떠오르게 된 중요한 계기는 전태일의 분신사건이었다. 평화시장 노동자로 일하던 전태일은 당시 최하층 노동자들의 기본적인 근로조건 개선을 위해 노동운동에 뛰어들었으나 노동탄압이 거세지기만 하자 1970년 11월 13일 근로조건개선을 호소하기 위한 방편으로 분신자살을 시도하였다. 창현교회의 주일학교 교사로도 활동했던 전태일의 죽음은 사회 일반에 적잖은 충격을 주었을 뿐 아니라 진보적 선교관을 접하고 있던 교회에도 큰 도전이 되었다. 도시선교위원회에서 벌이던 기존의 활동들은 진보적 선교관에 입각한 본격적인 노동운동과 빈민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영등포와 경인지역에서는 도시산업선교회 이름으로 노동조합 조직과 운영에 관한 교육사업 중심의 민주노조운동이 본격화되었다.

1969년부터 노동조합 지도자 훈련프로그램을 운영했던 도시산업선교회는 노동운동의 실제와 이론, 조직가의 자질과 조직 기술 등 노조활동을 위한 전문교육을 실시하여 21회에 걸쳐 12,000여명의 교육생을 배출하였다. 영등포사업선교회와 인천산업선교회는 100여개 기업체 노조를 지원했고 교육받은 노동자는 4만여 명에 달했다. 이중 청계피복노조(1970.11.22.), 동일방직 노조(1972.5.10.), 원풍모방노조(1972-1974), 콘트롤데이타노조(1973.4.15.), YH무역지부노조(1975.5.24.) 등이 대표적이다. 도시산업선교회 출신 노동운동가들의 다음과 같은 증언은 당시 도시산업선교회의 역할을 짐작할 수 있다.

이원보(한국노동사회연구소 소장) : 이미 70년대 전반기에 산업선교회가 조직 증가에 기여하게 되는데 왜 그런가 하면 조직을 하긴 해야 하 는데 독자적으로는 할 수가 없으니까 가까이 산업선교회에 가서 자문도 구하게 되고 해서 조직을 만드는 예가 많았습니다.

이근복(새민족교회 목사) : 아마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 치고 영산회관의 집회에 한번이라도 참석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1985년을 전후하여 영산은 지역노동운동의 메카였습니다. 영등포 구로지역의 노동자들을 다 지도할 수 있는 능력이 되지는 않았지만 영산은 노동운동의 보루였습니다.

김정근(민주노총 쟁의국장) : 당시에는 집회시위 자체가 불법이었기 때문에 집회는 종교건물에서나 가능했으며, 특히 경인 지역의 주요 집회는 거의 교회에서 개최하였습니다. 집회 내용은 탄압내용과 투쟁현황 공유, 단결을 강화하는 노래극 또는 연극 등의 문화행사, 노선, 사상 투쟁의 장으로 진행되었습니다.

한편 도시빈민들을 위한 인권운동은 1968년 12월 연세대에 도시문제연구소가 설립되면서 시작되었다. 미국연합장로교의 지원으로 출범한 지역운동 성격의 이 운동은 1969년부터 1973년까지 도심주변의 슬럼지역에서 주로 주거문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1971년 9월 1일에는 초교파적 선교기구인 수도권도시선교위원회가 조직되어 각 교단 소속 교역자들이 지역운동에 참여하였다. 서울에서는 와우아파트 붕괴사건 이후 낙산아파트, 연희아파트, 금화아파트 등 안전이 문제시되는 아파트들 중심으로 그리고 창신동, 오장동, 구로동, 사근동과 성동구 등 주로 도심의 슬럼지역에서 이루어졌다. 또한 지역교회를 통한 활동도 이루어졌는데 1971년 10월에는 청계천 성정동에 활빈교회가 설립되었고 1972년 4월에는 경기도 광주 대단지에 주민교회가 설립되어 지역운동이 활발해졌다. 이밖에 인천의 만석동과 안양 인근에서도 지역문제 해결을 위한 주민조직운동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1973년 7월 남산 부활절연합예배 사건으로 수도권도시선교위원회의 주된 활동가였던 박형규 목사와 권호경 전도사가 구속되자 12월에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원회로 이름을 바꾼 후 활동 재개를 준비했다. 당시 발표한 신조에서는 사회적 약자들이 처한 고난의 근본 원인이 정치, 경제, 사회의 부조리한 현실 때문이라고 보고 그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하는 것이 바로 교회의 선교적 사명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선교자이다.(마태복음 4:23, 고린도후서 6:1) 우리는 이 사회의 소외지역에서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고 절망의 수렁에서 몸부림치는 민중의 신음소리를 듣는다.(출애굽기 3:7) 우리는 오늘날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부조리가 하나님의 사랑의 도리를 저버린 부유한 자와 특권자 그리고 지식인들의 부정과 부패, 수탈과 억압에 기인한다고 본다.(아모스 5:10~13)???우리는 가난한 백성에게 그리스도의 은혜의 해(누가복음 4:13~18)를 선포하고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 그늘 속에서 하나님의 해방 사업에 참여하는 것이 오늘의 교회에 주어진 근본적인 선교사명이라고 믿는다.(마태복음 25)

이렇게 산업선교와 도시빈민선교에 대한 정당성을 성경을 통해 확인하며 신앙고백적 선교활동을 펼쳤지만 활동가들은 정부로부터 지속적인 탄압을 받게 되었다. 특히 1972년 12월 유신헌법 공표와 함께 유신체제가 시작되자 진보적 교회는 1973년 5월 20일 '한국그리스도인선언' 발표를 시작으로 정권의 비민주성을 비판하며 인권탄압에 저항하였다. 이 선언문은 익명으로 발표되었지만 정권의 잘못된 통치와 남북관계 운영에 대해 6개 항목을 적시하며 따지고 있는데 인권과 통일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진보적 선교관이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5) 한국의 현 統治勢力은 강한 자가 가난한 자를 수탈하는 오늘의 경제체제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한다. 국민, 특히 가난한 도시동자들과 농민들은 가혹한 수탈과 사회적 경제적인 부정으로 희생을 당하고 있다...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극단적인 非人間化와 不正의 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하여 싸워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역사에 있어서 가난한 자들이 부유해지고 눌린자들이 보호를 받고 모든 백성이 평화를 누리게 되는 메시아의 나라가 실현되는 과정을 증거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6) 지금 南北의 정권은 통일의 대화를 단지 그들 자신의 집권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구실로 삼고 있으며 한국 민족의 國土統一에 대한 열망을 배반하고 있다. 南北은 진정한 和解를 이룩하려는 민족적 자세를 확립하여 우리 민족 전체가 참다운 共同體를 수립할 수 있도록 깊이 모색하여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人으로서 지난날의 쓰라린 싸움에 대한 경험, 이데올로기와 정치, 경제제도의 차이를 넘어서고 국민을 억압하는 현재의 상황을 극복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통일을 실현할 수 없다.

유신체제에 저항하는 활동가들과 학생운동 주도자들이 구속된 이후 기도회나 가두시위에서 인권탄압 사례가 속출하자 교회 차원의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1973년 11월 23일과 24일 장충동 분도회관에서 신앙과 인권협의회가 열렸고 '인권선언'이 채택되었다. 이 문서는 개신교 인권운동에 있어서 인권에 대한 존엄성 근거를 제시하고 교회의 가장 큰 과제가 인권 확립에 있다고 밝힌 최초의 문서이다.

인권은 하나님이 주신 지상의 가치이다. 인간을 그의 형상대로 지으신(창 1: 27) 하나님은 인간을 모든 측밤[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키며 인권의 침해가 없는 사회를 이루어 나아가고 계신다.

그의 역사하심을 따라 교회는 인권의 확립을 지상의 과제로 믿고(눅 4: 18) 교회의 시대적 사명이 개인의 생존의 근거이며 사회발전의 기초인 인권확립에 있음을 확신한다.

이어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ational Church Council in Korea: NCCK)는 1974년 4월 11일 인권위원회를 조직하여 본격적인 인권운동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나 1974년 1월부터 대통령 긴급조치 제1호와 제2호가 시행되고 유신체제에 대한 반대움직임을 탄압하는 과정에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하 민청학련) 사건이 발생하자 시국은 더욱 불안정해져갔다. 교단 총회 차원에서 유신체제 하에서 우려되는 인권상황에 대한 시국선언문이 연이어 발표되었는데 1974년 9월 기장 제59회 총회가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예장통합 제59회 총회와 기감 제12회 총회도 이어서 시국선언문을 발표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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