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 복음전도가 여전히 강조되어야 하는 이유들

1. 선교의 핵심사역으로서의 복음전도

안승오 교수
안승오 영남신대 선교신학 교수

복음전도는 선교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사역이다. 아프리카 동부 동방정교회의 대주교인 안드로우사의 아나스타시오스가 한 소녀의 죽음 후에 깨달은 바를 사이더가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 우리의 형제와 자매들이 갈망하고 있는 것은 막연한 위로의 말이나 약간의 물질적 도움, 혹은 문명의 부스러기들이 아니다. 그들은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죽음을 초월할 수 있는 인간의 존엄성과 소망을 원한다. 결국 그들은 완전한 신이자 완전한 인간이신, 그리고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찾고 있다. 연령과 계층에 상관없이,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상관없이, 유명하든 유명하지 않든, 무식하든 고학력자이든,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에서 부활의 기쁨을 누리고자하는 갈망이 자리하고 있다.”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죄의 문제이고 이것의 해결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것은 성경이 일관되게 주장하는 핵심적인 가르침이다. 사회가 변혁되고 정의로워지고 복지가 향상된다고 해서 그것이 구원은 아니다. 구원은 오직 왕께 대한 순종과 믿음을 통해서만 주어지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구원을 전하는 활동인 복음전도는 선교의 핵심적인 목표가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스캇 선퀴스트는 보쉬의 글을 인용하여 “보쉬는 복음전도가 선교와 분리되는 것이 아니고, 선교의 핵심이라고 말하였다. 복음전도는 선교의 중심, 핵심, 그리고 초점이다. .... 복음전도가 배제된다면, 선교는 없어진다. 그것은 선교를 멈추는 것이다.” 라고 기술한다. 서정운도 이와 유사하게 선교의 여러 요소들을 언급한 후에 “이 중에서 특별히 복음 전도가 선교의 중심(center), 핵심(core), 심장(heart)이며, 나머지가 그 중심에 연관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전도보다 공존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에큐메니칼 진영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양적 성장을 이루겠다는 태도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필요한 타인 존중의 태도와 공존할 수 없다.” 라고 주장한다. 협의회에는 타인과 공존하는 것이 전도보다 더 중요한 것이라고 보기 때문에 전도를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양적 성장을 이루겠다는 태도”라고 폄하하여 표현하는 경향이 있다. 공존을 소중히 여기는 입장에서는 전도가 좋게 보일 리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전도를 제국주의적인 선교행태, 이기적인 자기 세력 확장, 개종 강요 행위 등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자세를 가지는 경우의 한계점에 대하여 이원규는 “.... 정치의식, 사회의식, 역사의식을 강조하다 보니 자연히 신앙적인 열정은 그만큼 약화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미 진보적인 선교 이해를 가지고 있는 교회는 양적으로는 성장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라고 분석한다. 반면에 복음전도를 강조한 교회들의 성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들에게 선교는 무엇보다 복음화였고, 따라서 모든 인적, 물적 자원을 동원하여 전도에 힘썼으며 열심히 교회를 세워 나갔다. 교단별, 개교회 별로 배가 운동과 부흥 운동에 심혈을 기울였다. 개척교회 설립과 해외 선교사 파송에도 앞장섰다. 이러한 전도를 가능하게 하기 위하여 평신도들에게 신앙적으로 강도 높은 교육과 훈련을 시켰다. 이렇게 전도와 복음화를 최대의 목표로 삼은 각 개체 교회들은 커지기 시작했고, 교단별로도 교회수가 증가하고 전체 교인수도 급증하게 되었다.”

물론 교회가 복음화만을 강조하면서 윤리적인 차원에서 문제가 발생되면 그것은 분명 큰 문제다. 교회는 분명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도록 철저한 윤리적 삶과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한다. 하지만 윤리적 과제는 선교를 위한 바른 자세이며 삶이지 그것 자체가 선교의 목표는 아니다. 윤리적 삶은 선교를 위한 필요조건이 될 수 있지만, 그것 자체로 충분조건이 되지는 못한다. 즉 아무리 수준 높은 윤리적 삶을 산다 해도 여전히 입을 열어 복음으로 초청하는 것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결단이 없이는 선교의 열매가 맺혀지기 어렵다.

2. 구원을 위한 유일한 길로서 하나님의 최대 관심

Missio Dei(하나님의 선교)개념의 출현 이후로 온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통치를 강조하면서 하나님의 뜻은 인류의 구원이기보다는 온 세상의 샬롬 이라는 점이 강조되었다. 하나님의 뜻이 그런 방향으로 이해되면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선교는 복음을 전하여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끄는 전도가 아닌 세상의 샬롬을 만드는데 기여할 수 있는 대화와 공존이라는 점이 더 강조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전도는 공존과 샬롬을 깨뜨리는 부정적인 요소로 인식되는 경향이 많아지고 있다.

그런데 과연 하나님의 관심이 구원이 아닌 ‘샬롬’ 또는 구원이 없는 ‘샬롬’ 인지 등을 잘 돌아볼 필요가 있다. 기독교 복음의 핵심 진수라 할 수 있는 요한복음 3장 16-17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 3: 16-17)라고 말씀하고 있다.

협의회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라는 부분만 강조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런데 세상을 그렇게 사랑하신 하나님이 세상을 위해서 하신 일은 다른 것이 아니다. 바로 독생자 예수를 통하여 그 세상을 구원하시는 것이다. 그 목적이 있었기에 하나님은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만약 세상을 그냥 잘 살게 하기 위한 목적을 지니셨다면 하나님은 굳이 예수를 지상에 보내시고 그 많은 고난을 겪게 하시고 결국 십자가에 못 박는 일까지 하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최대의 관심은 단순히 이 세상의 정의와 평화가 아니라 이 세상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지는 구원 즉 영생을 얻는 것이다.

그런데 이 영생을 얻게 하는 유일한 사역은 바로 복음전도의 사역이다. 이 점에 대하여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고전 1:17)라고 선언한 후에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 21) 라고 선언한다. 사도바울은 많은 학식과 경험을 지녔지만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신 유일한 방법은 인간 눈에는 미련하게 보이는 전도였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사이더는 “사회 운동은 아무리 선하거나 광범위하다 할지라도, 그것만으로는 사람들로 하여금 영생으로 가는 길에 들어가게 할 수 없다. 오로지 우리가 복음을 나누어주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영접하라고 초청하는 복음전도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라고 주장하면서 “놀랍게도 하나님은 그 목표를 향해 가시는 역사 가운데 우리의 복음전파의 노력을 사용하신다(롬 10:14-21).” 라고 강조한다. 복음전도는 세상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최고의 방법이며 최대 관심사항인 것이다. 그러므로 전도는 선교의 핵심 목표로 자리매김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계속)

안승오(영남신학대학교 교수, 선교신학)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안승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