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선우 작가
황선우 작가

필립 얀시의 책 <교회, 나의 고민, 나의 사랑>을 교회 담임목사님께서 설교 시간에 추천해주셨다. 몇 년 전의 나 같으면, 당시 책을 셀 수 없이 읽을 때였음에도 이 책은 읽지 않았을 것 같다. 가장 큰 이유로, 교회에서든 다른 어떤 곳에서든 리더 또는 권위자를 따르는 자세가 되어있지 않아 담임목사님이 추천해주신 책이라 한들 ‘굳이?’ 이러면서 귀담아듣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나의 입에는 “꼰대”라는 단어가 늘 붙어 다녔다.

몇 년 전, 대학생 시절의 나는 하나님이 주신 ‘북한 선교’의 비전을 발견하고 비전을 공유하는 한 교회를 찾아갔다. 혼자 서울에 올라와 교회를 찾지 못하던 나에게 비전과 함께 정착할 교회까지 하나님이 보내주셨다.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위해 노력하고 성취도 해가며 열정 넘치게 살던 나는, 모든 것이 하나님 은혜임에도 서서히 나의 의를 높여갔다. ‘역시 난 대단해!’ 나의 마음에서 비전이 하나님보다 높은 자리에 올라간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비전인데 그것을 망각하고 비전이 우상화된 듯한 나를 발견했다.

비전이 하나님보다 높은 자리에 있으면 어떻게 되나. 젊을 때는 혈기가 넘친다. 그런 나에게 리더, 멘토, 심지어 교회도 전혀 필요 없어 보였다. 혼자서 다 할 수 있는데 뭐하러 굳이 그런 게 필요하겠나. 특히 나는 북한 선교의 비전이 있다 보니,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선교사로 부르셨는데 지금 당장도 선교사라 하면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많이 가졌다. 기독교 신앙을 버린 건 아니었지만 점점 교회를 잘 가지 않는 특이 현상을 보였고, 교회에서 양육 받는 것 또한 거부했다.

비전을 위해 글 쓰는 일을 시작하고 ‘작가’를 직업으로 가지면서는, 나의 독자들 중 나에게 “한국의 필립 얀시가 되길” 응원하는 분이 꽤 있었다. 기독교 작가라는 공통점으로 나와 필립 얀시를 엮은 것으로 보인다. 매우 큰 응원이고 기분 좋은 말이다. 하지만 당시의 나에게는, 나의 의가 충만하던 나에게는 그런 응원조차도 나를 필립 얀시라는 틀 속에 묶는 것 같았다. 게다가 필립 얀시가 당시 자신의 SNS에 쓴 글 중 내가 동의하기 힘든 말이 있는 걸 보고 굳이 필립 얀시의 책을 보지 않았다.

물론, 항상 이와 같은 실수만 하지는 않았다. 열정 넘치고 매번 최선을 다하던 모습은 지금 그리고 앞으로도 잃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 열정이 하나님을 향한 마음보다 높아지면 일을 그르치게 된다. 나는 다행이라 해야 하는 건지 일을 그르치기 직전에 이를 깨달았다. 평소 알던 분이 먼저 일을 그르치는 걸 보고 간접 경험했다. 그분에게서 나의 모습이 보였다. ‘내가 지금처럼 쭉 가면 저렇게 되겠다.’

내가 교회를 잘 가지 않고 방황하던 때에, 물론 당시는 방황이 아니라 생각했지만, 늦은 밤 나에게 전화 주며 교회의 중요성을 말해주던 전도사님이 있다. “너가 비전 위해 열심히 달려가는 것 알고 선한 목적을 가지고 그러는 것도 아는데, 교회에 속하고 양육 받는 건 우리가 평생 해야 할 일이야. 성경 많이 읽고 기도 많이 하는 것 다 중요하지만 교회를 다니는 것 역시 큰 의미가 있어.” 당시에는 하나도 이해가 안 됐던 말이다.

먼저 엇나간 사례를 보고 또 코로나19로 혼자 있을 시간이 많아 비전을 재점검할 시기가 있었다. 그때 특히 오랫동안 묵상했던 것은 다윗이 사울 왕을 대하던 모습이다. 사울 왕이 다윗을 그렇게나 괴롭히고 또한 다윗이 사울을 죽일 기회를 얻었음에도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않는다. 이는 다윗이 사울 왕의 권위를 존중했기 때문이다. 사울은 악한 권위자이기에 그를 죽이는 게 이로울 거라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다윗은 조급해하지 않았다. 이는 다윗이, 사울을 왕으로 세운 하나님의 권위를 존중했기 때문이다.

권위자에 대항하는 사례를 많이 봐왔다. 히틀러를 죽이려 했던 본회퍼 목사, 일제에 맞선 독립운동가, 북한 정권이 무너지길 기도하는 기독교인 등. 이들이 한 일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엇나가지 않는다. 이들이 대항한 권위자인 히틀러, 일제, 북한 정권 등은 모두 단순히 악한 걸 넘어 신앙의 자유를 침해하는 등 하나님의 권위를 왜곡시켰기에 대항해서라도 바로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사례에만 집중하다 다윗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 또한 문제가 됨을, 나는 나중에야 깨달았다. 내가 이런 사례에 집착한 건 아니지만 분명히 나의 모습과 다윗의 모습은 많이 다름을 보았다. 윗사람이 뭐라 하면 “꼰대”라 속삭이는 게 습관이 된 내가 부끄러워졌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다. 몸 된 교회로 다시 돌아가 양육 받기 시작했다. 북한 선교라는 비전 역시, 아무리 해외로 나가는 선교가 아니라 하더라도 단순히 내가 혼자 세상에 나가 선교사가 되는 게 아니라 교회에서 양육 받고 교회에서 보내는 평신도 선교사가 되도록 준비하고 있다. 또한 교회 안에서 멘토를 모셨고, 결혼할 때 주례도 그 멘토님께 부탁드렸다. 몇 년 전의 나 같으면 주례 없는 결혼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흘러 설교 시간에 필립 얀시의 책 <교회, 나의 고민, 나의 사랑>을 추천받고 열심히 읽어보았다. 우선, 필립 얀시에게 배울 점이 많았다. 단순히 그의 SNS 글 중 하나가 동의하기 힘들어 배척했던 것이 부끄러웠다. 그런 비본질에 묶여 정말 본질 되신 예수님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필립 얀시에게서 배울 점 역시 있는 그대로 보지 못했다. 필립 얀시라는 틀 속에 묶일 필요는 없지만, 나에게 “한국의 필립 얀시가 되길” 응원해주는 독자들에게 더 없는 감사를 드릴 마음은 점점 커지고 있다.

그리고 필립 얀시의 이야기를 읽으며, 그가 교회에서 상처받았던 것이 정말 회복된 것이 느껴졌다. 상처만을 안고 있으면 그 기억이 더 왜곡되어 악화되기 마련인데, 필립 얀시는 어릴 적 자신에게 상처 줬던 한 교회가 사실 자신의 삶에 끼친 긍정적인 영향이 있음을 보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진심으로 인정하는 모습이 있었다.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가정에서 입었던 상처를 계속 안고 있을 때는 어릴 적 기억이 점점 더 암흑으로 변해갔지만, 상처받은 부분이 회복되면서는 사실 어릴 적 가정에서 얻었던 긍정적인 것이 꽤 있음을 알았다. 그로 인해 내가 잘 걸어올 수 있었다는 것에 하나님께 감사했던 기억이 있다. ‘필립 얀시에게서 더 많은 것을 배우리라.’

선교단체나 기독교 시민단체 활동이 교회보다 앞선 이들, 상처로 인해 교회를 떠난 이들, 교회를 다니고 있지만 왜 다니는지 모르는 이들 등 모두 자신의 상황을 교회 안에서 해결하길 권유하고 싶다. 교회가 자신이 원하는 발언을 해주지 않는다 해도, 교회가 당신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고 해도, 그래서 새로운 교회에 가는 일이 생기더라도, 교회 자체를 등지지 말고 교회 안에서 방황하고 교회 안에서 치유 받자. 그리고 예수님과 그의 몸 된 교회가 먼저 된 삶을 살자.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비전이 교회 안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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