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길을 가다
©도서 「십자가의 길을 가다」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셨네. 추악하고 더러운 나의 죄 때문에. 내가 지은 나의 죄 때문에 주님께서 날 위해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네. 머리엔 가시관 쓰시고 손과 발에는 대못을 박히셨지. 주님은 죄 없으신 하나님의 어린 양! 속죄제물이 되시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셨네. 십자가 위에서 죽임을 당하셨네.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그 보배로운 피 흘리셨지. 흠 없는 어린 양의 피로 우리의 죄를 속해 주셨네. 난 주님을 믿네. 십자가 위에서 날 위해 희생하신 주님의 그 크신 사랑을 믿네.

이일화 – 십자가의 길을 가다

기독시민교양을 위한 나눔 윤리학
©도서 「기독시민교양을 위한 나눔 윤리학」

‘윤리학’이란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하거나 하지 않도록 판단을 내리는 데 기준이 되는 보편적 가치나 규범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문제는 판단 대상이 되는 인간의 행위가 매우 다양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학문’으로서 윤리학은 행위의 종류나 층위를 형식상 구별하여 다양한 하위 영역으로 발전해왔다. ‘나눔 윤리학’도 그러한 하위 영역 중 하나로, ‘나눔’과 관련된 인간 행위를 관찰하며 어떤 나눔 행위가 우리에게 필요하거나 혹은 필요하지 않은지를 판단한다. 아울러 그 판단 기준이 되는 전통적 가치나 규범을 의심하고 현대 사회에 적합한 새로운 가치와 규범을 탐구해나간다. 사랑이 정의와 분리될 수 없음을 이해하는 것이 이 시대 시민교양이다. 동시에 ‘나눔’이 ‘나누기’와 분리될 수 없음을 이해하는 것이 이 시대 시민교양이다. 그러나 정치를 이데올로기의 격투장으로 오인하는 상당수 한국 기독교인들은 ‘정의’와 ‘나누기’ 문제를 따지는 것을 교회가 신봉하는 자유주의에 대한 저항이나 파괴로 여긴다. 물론 나눔 윤리학을 기독시민교양으로 설명하려는 뜻이 현대 시민사회의 나눔과 나누기 문화 및 질서에 대한 기독교인의 이해를 도모하는 데에만 있지 않다.

김혜령 – 기독시민교양을 위한 나눔 윤리학

요한을 읽다
©도서 「요한을 읽다」

요한복음 3:5에서 예수는 위에서 태어나야 한다는 점을 재차 말씀하시는데, 이번에는 이를 ‘물과 성령으로’ 나야 한다고 표현하신다. ‘물과 성령으로’라는 표현은, 회개와 예수를 향한 믿음을 토대로 사람들이 오랫동안 기다려 온 새 언약의 영이 일으키신 마음의 거듭남을 체험해야 한다는 뜻이다(참조. 겔 36:25-27). 새로 태어남을 밑받침하는 것이 육과 영의 대비다. 여기서 사용한 이분법은 본질상 영적이다. 영적 태어남(성령으로)은 자연법칙에 따른 태어남(육으로)과 다른 범주다. 전자는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입구를 제공하나, 후자는 그러기에 불충분하다. 이 이론이 옳다면, 이것이 35-50절과 51-59절의 유사점 및 차이점을 설명해 줄 것이다. 두 본문의 유사점이 나타나는 이유는 후자가 나중에 베꼈기 때문일 것이다. 둘 사이에 차이점이 존재하는 이유는 요한이 그의 내러티브에 51-58절을 추가해 성례와 관련된 주제를 강조하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이 논리적이다. 네 번째 복음서에는 주의 만찬 내러티브가 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요한이 51-58절을 덧붙인 까닭은, 성찬이라는 주제가 예수는 인간처럼 보였을 뿐이지 실제로 인간이 되지는 않으셨다고 떠들던 가현설의 주장에 맞서 예수의 성육신과 죽음이 사실임을 강조해 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마빈 페이트(저자), 박규태(옮긴이) - 요한을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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