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희 목사
이태희 목사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3:13-16)

여기서 “영생”은 “영원한 생명”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곧 “육적인 생명”이 아니라 “영적인 생명”을 의미한다. 그리고 바로 이 “영적인 생명”이 “영적인 믿음”이다. “영적인 믿음”이 “영적인 생명”을 주어 “영생,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기 때문에 “영적인 생명”은 곧 “영적인 믿음”인 것이다. (영원한 생명, 영적인 생명, 영적인 믿음은 동의어)

예수 그리스도를 “이성적인 믿음”으로 받아 들일 때 그 사람의 영혼 안에 “영적인 생명”, “영적인 믿음”이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 때 비로소 내 “육안”에 보이지 않던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영안”이 열리기 시작하고, 비로소 내 귀로 들을 수 없었던 하나님을 나의 영의 귀로 들을 수 있게 되고, 이 땅은 여전히 사탄 마귀의 영향력 아래 있지만,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와 통치를 누릴 수 있는 “영적인 생명”, “영적인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반드시 추가적으로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다. 비록 우리의 “이성적인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 있고, 또 받아들여야만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이성은 태초의 아담과 하와의 원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상태, 즉 하나님을 거역하고 거부하는 그런 타락한 본성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가 다른 불신자들에게 예수님에 대해 가르쳐 준다고 해서 그들이 자연스럽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거듭남의 역사를 위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실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기도 외에는 이런 류가 나갈 수 없다”라는 사실이다. 좋은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자동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 아니다. 크리스천 학교에서 공부했다고 자동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게 아니다. 누군가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줘야 한다. 하나님의 보좌를 흔들고 마귀의 권세를 깨뜨려서 성령 하나님이 그의 “타락한 이성”이 깨어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역사적인 증언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중보 해줘야 한다. 왜냐하면 사탄 마귀의 역사가 그것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바리새인들 보세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여서 영적으로 거듭나게 되면 비로소 우리는 영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 즉 “믿음의 사람”,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믿음의 사람이라고 다 같은 믿음의 사람인가? 믿음의 사람이라고 다 동일한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고 있는가? 다 동일한 하나님의 능력이 그들의 삶에 나타나고 있는가? 아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분량, 믿음의 그릇이 사람들마다 다 다르기 때문이다.

하늘에서 똑같은 물을 부어 주어도 그 물을 받는 그릇의 크기에 따라 받아낼 수 있는 물의 양이 다 다르다. 그와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차별이 없이 다 동일한 약속이다. 그러나 그 약속을 누리는 정도는 사람들마다 다 다르다. 왜냐하면, 믿음의 그릇, 믿음의 분량이 사람들마다 다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들마다 “믿음의 분량”이 다 다른 이유는 “믿음의 성장”의 정도가 사람들마다 다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믿음이 어린 아이의 믿음이고, 어떤 사람은 청소년기의 믿음이고, 어떤 사람은 성숙한 어른의 믿음인 것이다. 이처럼 다 똑같은 믿음의 사람이지만 그 “성장의 정도”가 다 다르기 때문에 “믿음의 분량”이 다 다른 것이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롬14:1)

믿음이 연약한 자가 있고 믿음이 강한 자가 있다. 어떤 사람은 기도할 때 추호의 의심도 없이 믿음을 가지고 나아 가는데, 어떤 사람들은 자꾸 마음 속에 의심하면서 자꾸 뒷걸음질 친다. 왜냐하면 사람들마다 믿음의 분량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믿음의 분량은 운명적으로 결정된 것인가? 물론 아니다. 베드로를 보라. 예수님을 배반하고 도망갔던 베드로의 믿음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우리의 믿음을 성장시켜서 믿음의 분량을 키워가야 더 큰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의 믿음을 성장시킬 수 있는가?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야 한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마4:4)

본능과 이성으로만 살아가는 사람들은 육신의 떡만 먹고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육신의 떡만 가지고는 살아갈 수 없다. 그렇게 살면 그 사람의 믿음은 완전히 굶어 죽게 되어 있다. 그래서 더 이상 믿음으로 살 수 없는 사람, 믿음으로 살지 않는 사람이 된다.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입으로는 주여 주여 하는데 실질적인 삶은 철저하게 자신의 본능과 이성에만 귀속되어 있는 사람들-죄와 염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10:17)

믿음은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으로만 성장할 수 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은 오직 말씀의 떡을 먹어야만 믿음으로 살 수 있는 영적인 힘을 가질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예배는 “생명”인 것이다. 예배는 죄로 인해 흩어져 있던 우리의 평범한 삶의 모든 것을 모아 예수 그리스도께 다시 집중하게 한다. 바쁘게 사느라 잊어버렸을 수도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다시 집중하게 하여 찬송과 순종으로 하나님께 올려 드리게 한다. 물론 이 모든 것이 단 한 시간의 예배 시간 안에 다 일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매주, 매해 성실하게 반복하면 점점 더 쌓여서 우리의 믿음의 삶은 더욱 온전해져 간다. (계속)

이태희 목사(그안에진리교회 담임, 윌버포스 크리스천 스쿨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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