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진수 교수
가진수 교수

아가서는 ‘노래 중의 노래(Song of Songs)’라는 뜻으로 ‘아름다운 노래’를 의미입니다. 아가서의 또 다른 이름은 ‘찬송(Canticles)’ 혹은 ‘솔로몬의 노래(Song of Solomon)’이며, 로맨틱한 가사들로 왕과 그의 신부의 정열적인 사랑을 기리는 ‘시’ 모음집입니다.

아가서의 저자는 1005편의 노래를 지어 문학적 재능이 뛰어났던(왕상 4:32) 솔로몬으로 알려져 있으며, 본문에 처음 ‘솔로몬’이 언급된 이후 여섯 차례나 등장합니다(아 1:5, 3:7, 9, 11, 8:11, 12) 유대교에서는 아가서가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비유적으로 서술했다고 믿기 때문에, 아가서의 구절들은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출애굽 사건의 기념일인 유월절 기간 안식일에 낭송해왔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그리스도인들은 아가서를 자주 하나님과 그의 신실한 예배자들 간의 사랑을 상징하는 은유로 이해했습니다. 예를 들어, 이 사랑 노래의 일부분은 예배자들이 사랑의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 1707–1788)의 “Jesus, Lover of My Soul(비바람이 칠 때와)”(찬송가 388장)와 버나드 클레르보(Bernard of Clairvaux, 1090-1153)의 “Jesus, the Very Thought of Thee(구주를 생각만 해도)”(찬송가 385장)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아가서는 남자와 여자 사이의 낭만적 사랑의 열정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풍부한 이미지와 부끄러움 없는 관능으로 연인들은 서로의 육체적 매력을 찬양하고 육체적으로 가까워지고자 하는 열망을 나눕니다.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아 1:2) 일정한 규칙을 갖추거나 역사적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는 없지만, 아가서는 연인들이 그들의 욕망의 정점을 향해 나아가면서 쌓이는 극적인 긴장감을 잘 보여줍니다.

많은 사람들은 수세기 동안 이 사랑의 시들이 무슨 관계가 있을까 궁금해 왔습니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역사에서 인간의 성을 공개적으로 다루기 불편해하는 사람들은 아가서의 생동감 넘치고 때로는 외설적이기도 한 언어에 말문이 막히곤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또는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한 사랑의 은유로 해석함으로써 논란을 피했습니다. 다른 성경 말씀에도 이와 같은 해석을 뒷받침하는 구절들이 있습니다(겔 16장, 23장, 호 2장).

수 세기 동안 성경학자들은 아가서를 해석하는 데 다양했습니다. 초대교회 시기 유대인 지도자들 사이에서도 이 책이 성경 말씀으로 포함되어야 할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유대교 교사인 랍비들은 젊은 남자가 그 내용을 읽지 못하도록 금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유명한 랍비였던 아키바(Akiba)는 “아가서는 그 모든 것 중에 가장 성(聖)스럽다”라고 말하면서 성경에 넣어야 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아가서는 사랑의 표현을 솔직히 담고 있어 외설적으로 보이지만, 역설적으로 하나님과 신부된 우리 사이의 관계를 매우 가깝게 느껴지게 합니다. 아가서의 남녀 사이의 사랑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을 반영합니다.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아 1:2)

역사적으로 초대교회 시대의 기독교 해석자들은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상징으로 아가서를 자연스럽게 해석했습니다. 그리고 중세 기독교 신비주의자들에게 아가서는 하나님과 각 그리스도인 예배자 사이의 사랑의 상징으로 여겨졌습니다. 최근 일부 학자들은 이 책이 근동 문화권에서 여러 날 이어지는 결혼 축제 기간 동안에 낭송된 ‘사랑 시’ 모음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일부 유대교 전통결혼에서는 신랑이 “왕”으로 신부를 “아가씨”로 묘사하며 아가서에 서술된 솔로몬 연인을 신부로 설정하기도 합니다.

신약성경에는 아가서가 인용되지 않았으며, 기독교 시대 이전 유대인 공동체에서 이를 어떻게 이해했는지에 관한 기록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이후 유대교 전통과 기독교 모두 아가서를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사랑을 상징적으로 해석했습니다.

신약성경 일부에서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로 언급합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엡 5:22-23) 그리고 요한계시록 여러 곳에서 남녀 간의 관계를 어린양의 신부로서 표현했습니다.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계 19:7)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계 21:2)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계 21:9)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계 22:17)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영화, 텔레비전, 그 외 다른 매체들이 성적인 쇼나 영화를 버젓이 상영하는 것에 우려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오락물들은 낭만적인 사랑을 저급하게 만들고 상업적 이익을 위해 성을 이용합니다. 아가서는 부분적으로 성적 매력에 대해 상당히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으나, 하나님께서 이를 성경 말씀에 포함한 것은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아가서는 사랑의 비유뿐 아니라 로맨틱한 사랑에 대한 묘사로서도 가치가 있습니다. 많은 문화에서 결혼은 가족을 통해 크게는 사회계층과 유산을 통해서 성사됩니다. 성경은 교제, 친밀감, 영적인 연합과 같은 말씀의 중요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경 말씀의 시작 부분은 사람을 하나님의 모습으로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7) 그리고 아담이 그의 삶의 동반자를 발견하였을 때의 기쁨을 기록했습니다.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 2:23). 그러므로 성경이 ‘결혼’이라는 친밀한 연합에 대한 책을 최소 한 권 포함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아가서를 낭만적 사랑을 찬양하는 시의 모음으로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결혼을 통해 성적 친밀함으로 완성되는 남녀 간의 사랑은 하나님의 가장 큰 선물 중 하나이며, 이 선물로 인해 하나님은 우리의 감사와 찬양을 받으시기에 마땅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결혼이란 자기희생, 예수님의 신성 그리고 그분께 감사하며 순종하는 교회 간의 사랑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엡 5:31-33)
또한 이스라엘 선지자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 간의 언약을 결혼에 비교했습니다. 주님과의 언약, 즉 우리 하나님이 되어주시고 그분의 백성으로 보호하신다는 변함없는 약속은 우리가 그분 앞에 나아와 예배드리고 기념하는 근간이 됩니다(출 6:7).

신학적 비유 혹은 사랑과 결혼 등 어느 것이든지 아가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신실한 예배자이자 영적의 연인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바를 말해주며, 우리를 하나님과의 더 깊은 친밀함으로 이끌어 줍니다. 저자의 의도이든 아니든, 여전히 사람들의 사랑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있어 적합한 은유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부이며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은 남편이 아내에게 가지는 사랑과 같은 것입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엡 5:25)

아가서의 열정적인 사랑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그분의 신부인 교회를 얼마나 열정적으로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줍니다. 아가서의 남자가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고 부를 때에, 우리는 연인의 부름뿐 아니라 또한 우리를 향해 “나에게로 오라”고 손짓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그러므로 아가서의 원래 의미를 축소하지 않고도 이 성경의 말씀들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친밀한 사랑의 표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예배는 사랑하는 연인들과 같이 하나님께 받은 온전한 사랑을 열정을 다해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으로 돌려드려야 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 예배자들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할 뿐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마 22:37-39)

한편 아가서는 공식적 결혼예식은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연합함에 대한 행복을 나누는 자리로 공동체를 초대하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시온의 딸들아 나와서 솔로몬 왕을 보라 혼인날 마음이 기쁠 때에 그의 어머니가 씌운 왕관이 그 머리에 있구나”(아 3:11) 더 나아가 사랑은 죽음만큼 강력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은 죽음을 이기셨음을 선언합니다. “너는 나를 도장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아 8:6)

아가서는 우리에게 그분의 형상을 따라 남자와 여자를 지으신 피조물임을 알게 해줍니다. “나는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다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도다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그 열매는 내 입에 달았도다 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칫집에 들어갔으니 그 사랑은 내 위에 깃발이로구나”(아 2:1-4)

무엇보다도 아가서는 그분의 백성을 향하신 친밀하고 따뜻한 사랑이 주제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비둘기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아 2:10-12) 이 아름다운 시를 읽노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아가서는 사랑을 깊이 느낄 수 있게 하시고, 사랑으로 하나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부드러움을 경험하게 하십니다(아 4:1-15) 그리고 아담과 하와를 지으시고 아름답다고 하신 말씀에 이어 사랑하는 남녀가 하나가 된 결혼의 즐거움을 말해줍니다(아 7:1-8:3)

아가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핵심인 사랑을 여러 감각을 통해 잘 표현해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기까지 사랑하셨다는 진리 위에 이 사랑의 본질적 관계를 남녀간의 사랑의 표현을 통해 구체적이면서 실제적으로 느끼게 해줍니다.

예배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배자로 창조하셨다는 이 진리가 단지 피상적인 말씀이 아니라 나의 삶에 명확하게 인식되기 위해서는 우리 삶 자체가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주일예배와 같은 예식을 넘어선 하나님과 우리 피조물인 예배자들의 구체적 관계의 증거입니다. 일어나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정하고 우리의 일상에서 하나님이 성령님을 통해 말씀하시는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하루를 감사와 은혜로 마무리하는 각 예배자들의 일상 예배를 훈련해야 합니다.

매일 매 순간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것은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고, 찬양을 드리는 것을 넘어서는 본질적인 관계입니다. 아가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가 원인과 결과를 통한 기승전결이 아니라 영원히 끊을 수 없는 필요충분조건임을 알려줍니다.

가진수(월드미션대학교 예배학과 교수)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가진수 #예배가이끄는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