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설교학회 제34회 정기학술대회
한국설교학회가 4일 오전 제34회 정기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사진은 첫 번째 강연을 진행하고 있는 구아름 박사의 모습 ©한국설교학회 온라은 줌(Zoom) 캡쳐

한국설교학회가 4일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제34회 정기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대회는 온라인(줌)으로도 동시에 열렸다.

총 2개의 강연으로 구성됐다. 구아름 박사(토론토대학교 설교학)가 ‘설교에서 애통의 중요성과 그 실천의 윤리적 함의’, 이상규 박사(감신대학교)가 ‘위-디오니시우스의 부정신학과 부정의 방식으로서의 설교’라는 제목으로 각각 강연했다.

먼저 구아름 박사는 “고통은 우리 삶의 일부이며 설교에서 다뤄져야 할 필수적인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고통의 복잡함과 신비로움은 회중들뿐만 아니라 설교자들에게 큰 도전이 되어왔다. 특히 하나님 이미지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복음을 하나의 시각으로 전달하고 복합적이고 복잡한 삶의 컨텍스트를 지나치게 일반화 시켜왔다”라고 했다.

이어 “고통은 매력적이지 않고, 어디에나 있고 피할 수 없으며, 그 범위는 종종 압도적이다. 설교의 참여자들은 믿음 안에서 고통을 이해하고 대처하면서도 명확한 희망을 듣기 원하지만, 고통은 복잡하고 이해할 수 없으므로 회중들 뿐 아니라 설교자들에게 큰 도전이 되어 왔다. 고통을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배경들을 고려하지 않은 해석이나 약속된 미래와 현재 고통 사이의 매울 수 없는 간극의 실제로부터 도전 받는다”라고 했다.

이어 “다른 한편으로, 다양한 고난의 원인을 분류하고 신학적으로 인식하려는 노력이 중요하지만, 고통의 현실은 그 원인에 대한 명확한 식별이 불가능하고 고통을 해결하려고 시도하는 어떤 시도에도 취약할 수밖에 없다는 것 역시 인식해야 한다”며 “이러한 고통의 복잡함과 불편함은 고통을 슬퍼하는 것을 두려워 하는 것, 슬픔을 빨리 해소하거나 추방하려는 충동, 혹은 슬픔 자체를 회복을 위한 자산으로 만드는 것 등등으로 강단에서 나타나 왔다. 그러나 설교자들은 어떤 하나를 선택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설교에서 고통을 다루는 것은 이러한 불편함과 긴장 안에서 더 효과적으로 이루어 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거대 서사가 지니는 보편성과 전체성은 다름에 대한 개방성을 약화 시킬 수 있으며 심지어 거대서사에 편입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폭력과 억압으로 나타날 수 있다. 거대 서사는 보편적 선언을 할 수 있는 권한과 그 권한을 지닌 사람들의 기득권을 정당화 할 수 있으며, 특별히 이야기와 경험이 거대 서사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하찮게 만들거나, 주변화 하거나, 혹은 억압하는’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구 박사는 “기독교의 신앙을 형성하고 설명하는 거대 서사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개인이나 문화 혹은 공동체의 특수성에 반응하는데 실패한 거대 서사의 작동 방식 그리고 그것을 담아내는 동일성과 안정성을 추구하는 언어가 교회 공동체 안에서 고통을 다루고 회복력을 기르는데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거대 서사에서 그 서사적 행복한 결말을 극복하지 못한 고통의 이야기들이 공동체 안에 들려진다는 것은 긴장을 만든다”라고 했다.

그녀는 “기독교의 거대 서사가 하나님의 행위와 성품에 대한 핵심 증언으로써 세상을 창조하시는 전능하고, 자비롭고, 공의를 베푸시고, 언약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주로 말한다면 이 거대 서사에 긴장을 일으키는 반 서사들은 거대 서사에 질문을 제기하지만 불신앙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의 다른 표현으로써 나타난다”며 “이러한 측면에서 애통은 질서라는 이름 아래 일어나는 혼돈을 묵인하기를 거부한다. 애통은 질서의 결핍, 정의의 결핍, 성실의 결여에 대한 심오한 감각에서 비롯되며 샬롬의 갱신을 가져오기 위해 역사적으로 개입하기를 하나님께 정당하게 요청한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설교에서 고통을 다루는 것은 만족할 대답을 기대하지 않고, 질문을 열어놓고, 다양한 목소리들이 들려오는 것에 대한 불안정성에 대한 투쟁을 중단하지 않는 노력을 포함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애통의 언어는 기독교 신앙 공동체 안에서 지배적인 서사의 언어였던 승리, 희망, 번영, 심판, 죄, 그리고 인내에 도전하는 다른 방식의 복음의 언어로서 고통 당하는 이들의 언어를 형성한다”라고 했다.

끝으로 구 박사는 “언어는 상실 가능한 것이기에 언어가 공동체에 남겨지고 보존되어 진다는 것은 의도적일 수밖에 없다. 고통을 다루는데 있어서 말할 수 있는 어쩌면 유일하고 강력한 언어인 애통은 주어진 고통을 느끼고, 표현하고, 공유하고, 배우고, 그리고 서로 소통하는 중요한 삶의 부분으로서 공동체에게 그리고 개인에게 주어진다. 설교자들은 공동체가 상실과 무너짐을 경험할 때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채 남겨지는 이들이 생겨나지 않도록, 애통의 언어를 통해 개안과 공동체 안에 애통과 연대의 역동성이 풍성하게 실행되도록 의도적으로 도울 필요가 있다”고 했다.

구 박사에 이어 강연한 이상규 박사는 “설교학은 부정신학의 가르침에 귀 기울일 때가 되었다. 부정신학은 설교의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알려졌지만 완전한 이해를 허락하지 않는 하나님이며 설교의 내용이 원리로 환원될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한 사랑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부정신학은 역사적으로 신학의 주요한 흐름 중 하나였지만 이것이 설교에 미친 영향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크게 없는 듯하다”라고 했다.

그는 “본 연구는 위-디오니시우스 부정신학의 설교적 전용에 관한 것이다. 본 연구는 부정신학의 특징들과 신학의 패턴을 살펴보고 그것들을 어떻게 우리 설교에 적용할 수 있을지 탐험한다”라며 “위-디오니시우스는 서기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에 살았던 시리아의 신학자 또는 영성가이다. 그는 바울에 의해 기독교로 개종한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라는 필명 아래 오랫동안 자신의 정체를 감추어왔던 신비한 인물”이라고 했다.

이어 “하나님에 대한 디오니시우스의 역설적 이해는 그가 신플라톤주의 사상에서 빌려와 기독교 신학에 접목한 발현과 회귀라는 그의 핵심적 사상을 근거로 하고 있다. 디오니시우스는 발현을 삼위일체의 분화와도 관련시킨다. 그는 삼위의 신성 안에서의 분화는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발현들과 계시들과 관계’가 있다고 말한다. 디오니시우스에게 성육신은 ‘자기를 비우는 분화의 행동’”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디오니시우스 부정신학의 신학적 패턴인 탈신성화와 신성화 사이의 상호작용은 부정의 방식으로서의 설교를 위한 중요한 내용과 형식으로 기능한다. 신성화는 설교에 관련하여 두 가지 관심을 환기한다. 첫째, 신성화는 설교의 목적에 관한 관심을 환기하며 둘째, 신성화를 ‘어떻게’ 성취할 수 있는가에 관한 관심도 환기한다”며 “신성화는 설교자가 만들어 낼 수 있는 일이라기보다는 성령께서 행하시는 일이다. 그러나 설교자들은 동일화를 구현하는 설교를 통해 성령께서 행하시는 일들에 신실한 동역자로 참여할 수 있다”라고 했다.

끝으로 이 박사는 “위-디오니시우스의 부정신학은 탈신성화와 신성화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에게 신성화는 하나님이 삼위일체의 연합에서 자기를 분화시킨 자기 비움의 사랑을 통해 성취된다. 우리는 이런 부정신학의 패턴을 부정의 방식의 설교로 전용할 수 있다”라며 “부정의 방식의 설교는 동일화와 신성화 사이의 상호작용을 이해하고 그 상호작용을 활용하는 설교이다. 동일화는 청중들의 신성화를 목적으로 하고 신성화는 동일화를 통해 성취될 수 있다. 이런 동일화를 구현하는 설교는 청중들이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도우며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기 비움의 사랑을 실천하도록 이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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